임인년(壬寅年) 호랑이 이야기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다. 우리 집에서 오일장을 보러 다녀오려면 약 30리 길을 걸어야만 했다. 새벽에 집을 나서도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늘 한밤중이기 일쑤였고, 그중 10리 이상은 인적 없는 산길이었다. 막 시집을 온 새댁의 몸으로 머리에는 큰 짐을 이고 부지런히 산길을 걷다 보면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계속 뒤를 따라오는 느낌도 들었다. 어른들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호랑이라면서, 어두운 산길을 걷는 새댁을 다른 짐승들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따라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설화 유형 중에 하나다.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간 민중들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호랑이였다.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은 이름 없는 백성들의 소망이 모여드는 산신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흰 수염의 산신 옆에는 늘 호랑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호랑이는 우리 민속에서 백성들을 지켜주는 존재이자 산신령의 전령인 셈이다. 그것은 호랑이가 가진 강력한 힘, 산중의 짐승 위에 군림하는 당당함 위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일 것이다. 조선 후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쓴 ‘
폐특법 2045년까지 20년 연장 1995년 말 낙후된 폐광지역을 살리기 위해 제정된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관한 특별법(폐특법)의 시효가 2025년 12월31일에서 2045년 12월31일까지 20년 연장됐다. 비록 완전한 시효 폐지는 아니지만 법 제정 목적 달성 때까지 유효하다는 조항도 명문화해 사실상 법안의 항구적 적용의 근거가 담겼다는 평가다. 전국 첫 강원도자치경찰委 출범 강원도자치경찰위원회가 올 4월2일 전국 최초로 출범식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위원장에는 송승철 전 강원도립대 총장이 임명됐다. 강원도형 자치경찰제 정착을 위한 전략과제로 안심환경 구축, 안전문화 조성, 안녕치안 정착을 골자로 한 ‘3안(安)운동'을 제시하고 1호 사업으로 ‘지구대·파출소 근무환경 개선사업'을 선정했다. 강원도청사 신축 논란 재점화 강원도가 청사 신축의 시급성을 확인한 가운데 허영 국회의원이 캠프페이지 이전을 공식 제안했다. 춘천시는 이를 전격 수용했다. 강원도와 춘천시는 실무협의를 마치고 춘천시민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와 야권에서 공론화 필요성을 제기하며 도청
누르하치 건주여진 통일 세력 키워 후금, 사르후전투서 조명 연합군 격파 명나라 쇠퇴 속 조선 광해군 균형외교 인조반정 이후 중화숭배주의 재부상 후금의 조선 침략에 인조 강화로 도피 # 끝을 향해 가는 임진왜란 임진왜란 말기, 조선에 14만여 대군을 파병해 놓은 명나라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등 남부 4도 일본 할양안(割讓案)과 함께 정동행성 같은 조선 직할통치기구를 구상했다. 일본해군은 1597년(정유년) 7월 거제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해군을 대파했다. 일본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데 힘입어 그해 8월 일본육군 14만여명이 다시 북상했다. 고니시와 시마즈 등이 이끄는 좌군은 곧 남원과 전주를 점령했으며, 가토와 모리, 구로다 등이 이끄는 우군은 천안까지 북상했다. 다시 파천이 거론됐다. 그해 9월7일 해생(解生)이 지휘한 명군 기병대가 천안(직산) 전투에서 일본 우군을 격파했다. 복직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해군도 9월16일 진도 울돌목에서 일본해군을 격파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597년 말부터 조선군 5만여명과 명나라군 14만4,000명, 그리고 일본군 14만2,000명은 울산(가토),
△아리랑 (2012년 등재)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 역사적으로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일반 민중이 공동 노력으로 창조한 결과물이다.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는 민요는 약 3,600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선아리랑을 비롯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을 3대 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인류 보편의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한편, 즉흥적인 편곡과 모방이 가능하고, 함께 부르기가 쉽고, 여러 음악 장르에 자연스레 수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간의 창의성, 표현의 자유, 공감에 대한 존중이야말로 아리랑이 지닌 가장 훌륭한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 (2003년 등재)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음악적 이야기를 엮어 가며 연행하는 장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라는 뜻의 ‘판'과 ‘노래'를 뜻하는 ‘소리'가 합쳐진 말이다. 장단에 맞춰 부르는 표현력이 풍부한 창(노래)과 일정한 양식을 가진 아니리(말), 풍부한 내용의 사설과 너름새(몸짓) 등으로 구연(口演)되며, 지식층과 서민의 문화를 아우르는 점이 특징이다. 최대 8시간 동안 연행되는 동안 남성, 또는 여성 소리꾼은 1명의 고수의 장단에 맞춰 촌스럽기도 하고 학문적이기도 한
선인들 홍천 대표하는 누정 꼽은 `범파정' 당시 관아의 동쪽 2리 떨어진 곳에 위치 1940년 강원도지 `지금은 없어졌다' 기록 범파정 읊은 시 많아 `창작의 공간' 방증 `지역의 대표 유산' 복원하자는 여론 일어 결운리 은거했던 `이구'가 지은 `사미정' 범파정보다 상류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 후손들 강가서 물러난 자리에 다시 세워 누정은 누대와 정자를 함께 일컫는 명칭으로 누(樓)·정(亭)·당(堂)·헌(軒)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는 누정에 오르면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시를 짓기도 하고 유흥을 즐기기도 한다. 때로는 인륜의 도를 가르치던 장소로 기능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이 각종 모임을 갖기도 한다. 홍천 읍내의 학명루, 사미정, 범파정, 관수당, 야로정, 양망헌, 소학정 등이 대표적인 누정이다. 선인들은 홍천을 대표하는 누정으로 범파정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여행기나 지리지 등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범파정
일본 조총 도입 후 근세사회 토대 구축 도요토미 권력 장악 … 전국시대 마침표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국력 고려보다 약해 중화·오랑캐 논리의 성리학이 근본 원인 明 지원·이순신 등 활약에 망국은 피해 # 日 포르투갈인에게 신무기 입수 몽골 서북부와 북신장(北新彊)을 근거로 한 몽골 오이라트부 출신 에센은 칭기즈칸 가문(보르지긴씨)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몽골초원의 법’에 따라 대칸(大汗)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재상격인 타이시(太師)에 머물렀다. 1452년 에센은 실력을 갖추어 가던 칭기즈칸의 후예 토크토아부카 가한(可汗)을 죽이고 자립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대다수 몽골 부족이 에센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세력을 잃은 에센은 1454년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서만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를 영역으로 하던 오이라트 제국이 붕괴했다. 에센의 칭기즈칸 가문 학살에서 살아남은 바투몽케, 즉 다얀(大元) 가한은 어머니뻘 나이의 카툰(왕비) 만투하이의 도움으로 북원(北元)을 재건했다. 다얀과 만투하이의 후손들은 나중 차하르, 할하, 우량칸, 투메트, 오르도스, 융시예브 등 6개 투멘(부족)으로 나뉘었다. 다얀의 손자로 네이멍구 후허하오터 일대를 지배하던 투메트부 알탄칸 시대에
일반부 운문 강신월(춘천)씨·산문 김성남(안동)씨 장원 영예 전국 문학도 대상 두달간 작품 접수…제주·부산서도 응모 학생부 김주아·신민강 장원…탈북자 제장경씨 특별상 눈길 강원일보, 화천군, K-water 평화의댐지사가 공동 주최한 제2회 DMZ문학상이 분단, 대립, 상처, 아픔에서 평화, 화해, 통일,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특히 세계사적 역사의 부산물로 탄생한 DMZ의 비극적 요소가 문학작품이 지닌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희망의 언어로 재탄생, DMZ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일반부 운문 부문 장원을 차지한 강신월(춘천)씨의 ‘홍직이 고개'는 6·25의 참상을 어머니가 묻힌 ‘돌무덤'에 비유해 형상화하는 등 작품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생부 운문 부문 장원인 김주아(일산양일중 2년)양의 ‘시간'과 산문 부문 장원인 신민강(가평중 3년)양의 ‘두 대의 자동차'는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수작으로 인정받았다. 탈북자들이 응모해 특별상을 수상한 제장경씨의 ‘꽃제비, 남한에서 새 삶을 꾸다'는 북한에서의 실제 삶을 담아 놓은 작품으로 심사위원들로부터 공감을 받기에 충분했다. 학생부에서 조해밀(우석중 1년)양은
신라 시대 자장율사 창건한 봉복사 횡성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 일제강점기 의병부대 주둔지 역할도 전쟁의 상흔 간직 ‘신대리 3층 석탑’ 묵묵히 1,300여년 동안 이곳 지켜와 안석경 `천하지도' 모사하려 찾기도 인접한 태기산도 설화·역사의 보고 `태기산성' 세종실록 등에 기록 남아 영웅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해져 횡성군 청일면 신대리 버스 종점에서 내린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신대교가 나오고, 다리 건너 왼쪽에 마을 쉼터가 보인다. 쉼터 뒤쪽 밭 가운데에 ‘신대리 3층 석탑’이 늠름하다. 자장율사가 봉복사를 창건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선덕여왕 16년인 647년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탑이 점점 웅장해진다. 5m 높이다. 5층탑이었으나 3층만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은 더 장대하였을 것이다. 탑신을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움푹 파여 있다. 전쟁의 상흔이다. 화려하지 않으나 힘이 느껴지는 탑은 봉복산과 덕고산, 그리고 태기산을 배경으로 치열한 전쟁을 통과하여 1,30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 탑을 뒤로하고 절로 향한다. 노송 사이에 있는 부도가 절의 역사를 말하여 준다. 봉복사는 횡성군에 있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시기에
조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 이소사대 명나라 군사력에 눌려 사대주의에 중독 오이라트부 15세기 몽골 통일 후 명나라 압박 조선엔 사신 보내 동맹 제의하기도 동맹 이뤄졌다면 랴오둥 점령 국경 확장 가능성 조선-명-일본 간 세력 유지도 가능했을 것 # 조선, 자가당착에 빠지다 1392년 조선은 몽골제국의 잔해(殘骸) 위에서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긴다'라는 ‘이소사대(以小事大)' 정신의 위화도 회군(1388년)을 정치·군사적 배경으로 태어났다.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조선 건국세력은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한자로 화림(和林) 또는 화령(和寧)으로 표기된다는 것에 착안, 명나라에 새 나라의 국호로 화령과 조선 중 골라줄 것을 요청했다. 명(明)은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기자조선(箕子朝鮮)같이 이성계 정권이 명에 고분고분하기를 기대, ‘조선'을 골라줬다. 명의 압도적 경제·군사력에 눌린 조선 왕과 사대부들은 서서히 사대주의와 더불어 성리학적 화이관(華夷觀)에 중독돼 갔다. 고려가 사용했던 황제, 천자 같은 용어를 제후를 뜻하는 왕으로 바꾸고, 자주의 상징인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조선인 자체가 북송(北宋) 소식이 ‘맥적
조선 태종 즉위 전 공부하던 각림사 지금은 강림우체국 옆 옛터 표지석만 스승 원천석 만나고자 치악산 찾아 태종대·노구소 등 흔적 곳곳 남아 각림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각람사에 묵은 적이 있었다. 원천석에게 자문하여 깨우침이 자못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띠 집 두어 칸이 숲속에 있었는데, 태종은 즉위한 뒤 이 절을 특별히 돌보았다. ‘동국여지승람'은 각림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치악산의 동쪽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여기서 글을 읽었다. 뒤에 횡성에서 강무(講武)할 때, 임금의 수레를 이 절에 멈추고 고로(古老)들을 불러다 위로하였다. 절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고을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조세·부역 따위를 면제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강림우체국 옆에 ‘각림사 옛터' 표지석과 안내판이 태종이 공부하던 곳임을 알려준다. 건물을 지을 때 우체국과 뒤에 있는 교회부터 남쪽에 있는 면사무소까지 절의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면사무소에 들르니 직원이 건물 뒤 산기슭에 암자가 있었다고 가리킨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사이의 밭고랑을 자세히 보니 와편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축대 틈에도 와편이 보인다. 탑은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