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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 르네상스 개화의 물꼬를 트다

[유럽 인문학 기행-이탈리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비좁은 성당

 

1294년의 따뜻한 어느 봄 일요일이었다. 피렌체 곳곳에는 ‘꽃’이라는 뜻인 도시의 이름에 걸맞게 여러 가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시뇨리아(의회) 의원인 도미니크는 산타 레파라타 성당으로 가고 있었다. ‘피렌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젊은 부인, 예쁘장한 네 아들과 함께였다. 아이들 중 셋은 자기 앞가림을 할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나머지 하나는 포대기에 싸여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산타 레파라타 성당 앞 광장은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부분 미사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성당에 온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피렌체의 주교좌성당이었다.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산타 레파라타’를 모신 곳이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 때 고문을 당한 뒤 참수형을 당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영혼은 비둘기가 돼 날아갔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배에 실려 천사의 숨결을 따라 프랑스 니스까지 갔다고 한다.

 

성당에는 피렌체의 첫 주교로 존경받던 성 제노비우스의 유골이 안치돼 있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다들 일요일이면 다른 성당보다는 여기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고 싶어 했다. 또 세례나 결혼식을 거행할 때 가장 선호하는 성당이기도 했다.

 

도미니크 가족은 평소 잘 아는 성당 직원의 안내를 받아 성당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성당에는 구석구석에까지 의자를 배치해도 겨우 300여 명 정도밖에 앉을 수 없었다.

 

“일요일마다 이 성당에 자리를 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군. 성당이 이렇게 작아서야 어디 피렌체 시민으로서 체면이 서겠나? 성당을 좀 더 키우든지, 아니면 새로 짓든지 해야지.”

 

도미니크 가족 앞좌석에 앉은 한 노부부가 불만을 터뜨렸다. 나이가 일흔은 돼 보이는 백발의 어르신들이었다. 도미니크가 가끔 성당에서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복잡한 좌석에도 불구하고 미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도미니크 가족은 미사를 마친 뒤 인근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옆자리에서는 낯선 남자 세 명이 술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은행업을 하는 그가 얼굴을 모르는 것으로 봐서 그다지 지체가 높거나 명망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피렌체의 정세라든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경제라든가 하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잘난 척 하면서 떠들어대고 싶어 하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도미니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냈다.

 

 

“피렌체 인구가 내일 모레면 10만 명을 넘게 된다, 이 말씀이야. 토스카나 지역에서 인구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우리만한 도시가 어디에 있겠나? 그런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말일세. 바로 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야.”

 

도미니크는 아내를 쳐다보는 척 하면서 귀를 몰래 그 남자에게로 집중시켰다. 시의원인 만큼 시민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잘 들어놓아야 다음에 의회에서 회의를 할 때 이용해먹기 좋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다른 곳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저 성당이 만들어진 게 언제인가. 6세기라고 하지 않나. 벌써 700년 전이야. 수리를 여러 번 했다고 하지만, 다들 보다시피 얼마나 낡았나. 행사가 열릴 때면 얼마나 복잡한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 말고는, 우리 같은 서민들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피렌체의 주교좌성당이라는 게 저 모양이야. 피사나 시에나처럼 우리보다 인구나 경제 규모에서 훨씬 처지는 도시에서도 벌써 100년 전에 성당을 대대적으로 새로 짓지 않았느냐 말일세. 피렌체의 정치인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은 다들 뭘 하는지 몰라. 저 성당을 보고 부끄럽지도 않나 말일세.”

 

당시 피렌체는 토스카나의 최고 도시가 어디인지를 놓고 피사, 시에나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도로를 놓고 다리를 세우는가 하면 유명 예술가들을 서로 앞다퉈 후원하기도 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피사에 있는 시설물이나 유명화가의 작품이 피렌체에 없다면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심지어 피렌체와 피사는 1315년에는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도미니크는 남자의 말을 듣고 눈이 확 뜨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성당으로 눈길을 돌렸다. 성당은 정말 한눈에 보기에도 엉망진창이었다.

 

‘내일 시뇨리아에 가면 이 이야기를 꺼내야겠군. 토스카나 지역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자고 하면 되겠지. 자금은 지역의 유지들이 나눠서 내거나, 각 길드(조합)들에게서 거두면 될 것이고…. 안건이 채택되면 내 인기는 폭발적으로 올라갈 거야.’

 

도미니크는 아무도 모르는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왜 갑자기 남편이 혼자서 웃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늘 엄격한 표정이던 아버지가 웃는 모습을 보고 환하게 따라 웃었다.



 

이탈리아의 최고 성당을 짓자

 

다음 날 도미니크는 특별히 고른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그의 손에는 각종 자료가 가득 들려 있었다. 산타 레파라타 성당에 대한 내용은 물론 피사나 시에나 등에서 어떻게, 얼마나 큰 규모로 성당을 새로 지었는지를 설명하는 자료들이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달리면서 시뇨리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를 놓고 곰곰이 생각했다.

 

도미니크가 도착했을 무렵 시뇨리아에는 이미 많은 의원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워낙 경기가 좋은데다 주변 도시들과 분쟁거리도 없어 이날 회의에는 특별한 안건이 올라온 게 없었다. 지오반니 의장은 의원들에게 자리에 앉게 한 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시뇨리아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미리 상정된 안건은 없습니다. 혹시 긴급하게 제안할 내용이 있으면 누구라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없으면 바로 폐회하고, 자리를 옮겨 다 함께 차나 한 잔 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미니크는 의장의 인사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의장은 물론 다른 의원들도 깜짝 놀랐다. 도미니크가 한 번씩 돌출 발언을 하기는 했지만, 오늘 같은 날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존경하는 의장님, 그리고 동료 시의원 여러분. 도미니크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이해해 주신다면 저는 오늘 산타 레파라타 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의장과 시의원들은 도미니크의 입에서 산타 레파라타 성당 이야기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의원들도 있었다. 의장도 그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어서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말을 하라는 손짓을 했다.

 

“피렌체는 인구 10만 명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토스카나에서 우리 도시만큼 큰 도시는 없습니다. 은행업은 물론 섬유업까지 활황세를 띤 덕분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도미니크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장과 다른 시의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신이 났다.

 

“저는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보고 있노라면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합니다. 저 성당이 부자도시 피렌체의 성당이 맞나, 다른 도시 시민들이 피렌체에 왔다가 성당을 보면 얼마나 웃을까?”

 

도미니크가 여기까지 말을 꺼내자 일부 시의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야”라고 장단을 넣어주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시의원들도 있었다. 도미니크는 시의원들의 이런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피사는 1063년부터 새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나 됐습니다. 시에나는 30년 전에 이미 새 성당을 완성했습니다. 우리도 산타 레파라타 성당을 허물고 새로운 성당을 지읍시다. 피렌체가 토스카나의 정치·경제의 중심도시일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종교의 중심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건설비용은 우리가 나눠 내면 됩니다. 그리고 시민들이나 각 길드들로부터 모금도 하도록 하죠.”

 

도미니크의 말이 끝나자 시의원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의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다들 흥분한 얼굴이었다. 도미니크는 흡족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렇게 해서 시의회 주도로 새 성당 건설 작업이 시작됐다.



 

돔을 어떻게 올리나

 

처음에는 피렌체 시민 10만 명이 이용해도 불편하지 않을 규모로 짓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자금 문제 때문에 규모는 조금씩 줄어들어 결국에는 3만 명이 이용해도 괜찮을 규모로 축소됐다.

 

아놀포 디 캄비오가 건축을 맡아 1296년 공사가 시작됐다. 공사 진척도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늦어졌다. 캄비오가 죽어버린데다 세월이 흐를수록 시민들의 관심도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피렌체 건축가들이 골머리를 앓는 문제였다.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피렌체 시민들은 물론 이탈리아 모든 나라 사람들로부터 망신을 당할 처지였다. 공사를 시작하고 100년이 더 지난 1418년의 일이었다.

 

건축가들이 끙끙 앓은 문제는 바로 돔이었다. 피렌체의 모든 건축가가 대성당에 돔을 올려놓는 공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돔을 올릴 수 있습니다. 저에게 공사를 맡겨 주시지요.”

 

모든 건축가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돔을 올리겠다고 용감하게 나선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원래 조각가였던 그는 17년 전 산 조반니 세례당 공모전에서 기베르티에게 패한 사람이었다. 수모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로마로 달아나 각고의 노력 끝에 건축가로 변신했다.

브루넬레스키의 경력을 아는 피렌체 시뇨리아는 그의 자신감에 의문을 가졌다.

 

“어떻게 돔을 올릴 수 있는지 방법을 설명하시오.”

 

브루넬레스키는 전혀 굴하지 않고 계속 큰소리쳤다.

 

“그것은 저의 비밀이기 때문에 이야기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로마에서 고대 건축물, 특히 판테온을 연구하면서 대형 돔 건축의 비밀을 알게 됐다는 것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큰소리를 치면서도 어떻게 공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비법을 알리지 않으려 한 것은 돔 건축 공로를 온전히 독차지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법을 공개하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면서 고치려 들 것이고, 나중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공로를 주장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두오모 건설을 관리하던 시뇨리아는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그들은 브루넬레스키의 말을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시뇨리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 판테온에서 배운 대로 비계를 사용하지 않고 돔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로마에서 건축을 공부할 때 몰래 판테온 돔에 올라가 본 적이 있었다. 어떤 방법으로 벽돌들이 서로 완벽하고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브루넬레스키의 큰소리는 단순히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공사를 시작한 지 18년 만에 돔을 완성했다. 로마를 제외한 도시에서는 처음 보는 웅장한 걸작이었다. 미켈란젤로는 100년 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돔을 만들 때 피렌체 두오모의 돔을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브루넬레스키는 공사를 마친 뒤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1400년 전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구이자 장군이자 건축가였던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제 스승인 셈입니다.”

 

돔이 다 만들어진 덕분에 두오모도 착공 140년 만에 완공될 수 있었다. 봉헌식은 1436년 3월 25일에 열렸다. 이날 행사를 연 것은 당시 피렌체 달력으로 새해 첫 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날은 성모 영도 대축일(수태고지 기념일)이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유게니우스 4세는 마침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을 방문하고 있었다. 시뇨리아는 교황이 봉헌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수도원에서 산 조반니 세례당을 거쳐 두오모까지 이어지는 임시 통로를 만들었다. 통로 바닥에는 비단 카펫을 깔았고, 벽걸이 융단과 비단, 꽃 등으로 벽을 장식했다.

 

임시 통로를 따라 교황과 주교 37명, 추기경 7명, 시뇨리아 의원들, 외국 사절들이 두오모까지 걸어갔다. 봉헌식에서는 길라우메 두파이가 작곡한 모테트(목소리만으로 연주하는 짧은 교회 음악) ‘장미꽃이 만개하네’가 연주됐다.

 

성당의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로 정해졌다.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여기서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지금은 대부분 피렌체의 두오모라고 부른다. 두오모는 ‘대성당’이라는 말이다.



 

 

두오모에서 피어난 르네상스

 

두오모는 준공 3년 뒤인 1439년 페라라에서 가톨릭 공의회가 열렸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의 지도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유니게우스 교황에게 공의회 장소를 피렌체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 행사를 피렌체의 위상을 높이고 웅장한 두오모를 널리 홍보할 기회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교황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회의장을 피렌체 두오모로 이전했다. 이 행사에는 동로마제국 황제 요한 팔레올로구스와 동방정교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셉과 다른 주교, 신학자들이 참가했다. 코시모는 공의회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에게 숙식은 물론 필요한 편의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공의회가 열리는 동안 피렌체에는 동방에서 건너온 이른 바 ‘새 지식’이 넘쳐났다. 동방 교회의 지식인인 성직자들과 유명 학자들이 행사에 대거 참석해 희귀 도서 사본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서유럽에 르네상스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결국 르네상스가 시작한 장소는 두오모였던 셈이다. 대성당 이름의 뜻이 ‘꽃의 성모 마리아’이니 이름에 어울리는 ‘역사의 꽃이 피어난’ 사건이었다.



 

 

돔 건설에 성공해 두오모가 문을 열 수 있게 했던 브루넬레스키는 144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두오모에서 펼쳐졌다. 그의 시신은 돔 천장 바로 아래에 촛불로 둘러싸인 채 안치돼 시민들의 조문을 받은 다음 두오모 지하에 묻혔다. 묘비는 두오모 건축을 시작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묘비 맞은편에 세워졌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