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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일생 모은 '현대판화 사료' 국립미술관에 기증한 홍선웅 작가

발품 팔고 사재 들여 수집한 간행물·전시인쇄물 등 700여점
60년대 이후 민주화과정 판화 역할 보여주는 실물자료 선뜻
나혜석 판화표지, 민충정공 혈죽도 등 더 귀한 사료 보유중
"아카이브 김포에 보관 못해 아쉬워…시립미술관 건립 시급"

 

스테디셀러 '태백산맥' 표지작가로 유명한 민중예술계의 거목 홍선웅(69) 판화가가 일생 수집한 현대판화와 민중미술 관련 자료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자료로, 현대판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내용별로 보면 판화작품 41점을 비롯해 시집·소설·잡지·인문과학도서 등 표지에 판화를 활용한 간행물과 전시인쇄물, 시청각자료, 기념품, 홍보물 등 700여점에 달한다. 홍 작가가 기증한 판화아카이브는 '수록 실물'이라는 점에서 보전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자료 중에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 성명서와 미술인들의 4·13 호헌철폐 투쟁성명서 원본도 있다.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본거지인 '그림마당 민'에서 생산된 자료와 민중문인들이 발표한 시집 등의 표지에는 굵고 강한 선의 민중목판화가 실려 있는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판화의 역할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판화가 홍선웅의 예술인생은 늘 민중과 함께였다. 오사카·뉴욕·런던에서 열린 '한국민중판화전'과 '동북아 3국 현대목판화전',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등 수많은 국내외 전시를 통해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절절하게 새겼다. 작품들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퀼른 안파리나화랑 등에 소장돼 있다.

1980년대 사회적 혼란기에 그는 해직교사로 그리고 민족미술인협회를 창립해 사무국장으로 숨 가쁘게 살았다. 이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국제국장과 대변인을 역임하는 등 민중예술계에 헌신하다 1992년 건강상의 이유로 문예조직활동에서 물러나 김포 보구곶리 끝자락에 문수산판화공방을 열었다. 김포에 정착한 시절부터 창작뿐 아니라 근대판화를 연구하며 현대판화와 근대판화 아카이브 수집에도 열중했다.

홍선웅 작가는 근대판화 연구의 토대를 이룩한 인물이다. 과거 미술계는 근대를 한국판화의 암흑기로 간주했다. 당시 '근대미술' 연구가 작가론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긴 했어도 정작 근대판화에 대한 연구와 자료는 빈약했었다. 홍 작가는 오랜 시간 연구에 매진한 끝에 201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근대판화를 전문적으로 집대성한 '한국 근대 판화사'를 발간했다. 발품 팔고 사재 들여 수집한 자료가 책 내용의 근거가 돼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반향이 적지 않았다.

 

 

 

26일 보구곶리 공방에서 만난 홍선웅 작가는 "우리 판화는 고려 11세기 세밀하고 정교한 초조대장경 삽화본 변상판화(넓은 의미에서 불교판화)인 <어제비장전>과 13세기 해인사 사간판(寺刊板)인 <대방광불화엄경변상판화>부터 조선시대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등 왕성한 판각문화로 이어져 오는데 '과연 근대엔 판화제작이 없었을까'하는 의문에서 근대판화 연구를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근대판화는 일제 야욕을 비판·풍자할 때 사용되는 등 민족 자주적 의식과 저항정신을 깨우는 수단이었다"며 "종합잡지 '조선지광'(1922) 창간호 표지에 실린 오일영의 목판화 <백두산>은 우리 언어를 못 쓰게 하던 시대에 두터운 각선으로 힘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백두산 천지를 떡 하니 새겨넣었는데 '조선 민중이여 독립의지를 잊지 말자'는 메시지가 읽힌다. 이때도 이미 민중판화가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기증자료의 작가명, 당대 전시기간·전시장소 등에 대한 최종 확인작업을 거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홍선웅 작가는 "슬라이드라든지 사진상 자료로는 역사를 더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증한 현물자료들은 한국 판화사의 실제적인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700여점을 기증했지만 홍 작가는 1960년대 이전의 희귀 자료 등 여전히 국내 최고 수준의 근대판화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목판화 <개척자>를 표지로 쓴 '개벽'(1921) 창간 1주년 기념호와 평양 출신 화가 양기훈의 <민충정공 혈죽도>(을사늑약 거부를 고종에게 상소하고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기 위한 목판화)를 한 면 전체에 실은 '대한매일신보'(1906) 등이 대표적이다.

홍선웅 작가는 "내가 김포에서 여생을 보내는데 아카이브를 김포에 보관하지 못하고 국립미술관으로 보내야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며 "지방자치의 발전으로 이제 미술도 중앙 중심에서 지역으로 분산이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김포 미술인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시립미술관이 하루빨리 건립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포문화재단 신임 대표 등 관계자들이 예술경영 마인드와 전문성을 갖고 청년미술인들의 장을 넓혀가는 등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려는 것 같아 새로운 변화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