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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반복되는 ‘가정폭력 살인’… ‘피해자 보호’ 개선 움직임
올해 경기경찰과 인천경찰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의 화두는 단연 각 지역에서 발생한 ‘가정폭력 살인사건’을 막지 못한 경찰의 부실대응 질타와 재발방지책 촉구였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해당 사건들이 발생한 후 경찰은 책임자를 문책하는 데서 나아가 피해자 보호 중심으로 현장 대응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국회 차원의 움직임도 분주하다. 반복되는 비극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입법 공백을 메우기 위한 법안들이 앞다퉈 제시됐다. 경찰 ‘600장 SOS’ 외면… “골든타임 놓쳐” “600쪽 분량의 고소장은 피해자가 피로 쓴,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지난 10월21일 경기남부경찰청에서 열린 국정감사.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은 지난 5월 화성시 동탄에서 30대 여성이 교제하던 남성에게 납치 살해된 이른바 ‘동탄 납치살인’ 사건의 대응을 두고 경찰을 쏘아붙였다. 정 의원은 “끝내 경찰은 구속영장 신청을 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살해됐다. 이래도 경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고 질타했다.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최초 신고 때 사실혼 판단 체크리스트도 작성 안 한, 초기부터 대응을 잘못한 사건”이라고 경찰을 비판했고 같은 당 여러 의원들도 같은 지적을 이어갔다. 이 사건 가해 남성은 이미 여성을 수차례 폭행해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이를 어기고 여성을 찾아 납치 살해했다. 사건 발생에 앞서 여성이 폭행·강요·협박 등 그동안의 피해사실을 고소장, 녹취록·고소이유보충서 등 무려 600여 장의 처벌의견서로 엮어내 경찰에 구속수사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이를 외면한 사실이 경인일보 취재로 밝혀지면서(5월15일 인터넷보도) 경찰 부실대응 여론이 들끓었다. 여기에 가·피해자 사이 과거 접수된 폭행 초기 신고 때 출동 경찰관이 가정폭력이 아닌 교제폭력 사건으로 처리, 긴급조치 판단리스트를 작성조차 하지 않은 점 등 초동대응 곳곳의 허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경기남부청 국감 하루 전인 지난 10월20일 인천경찰청 대상 국감에서 동탄 납치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 대응의 미흡함이 나타난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과 관련해 국회의원들의 비판이 잇따랐다. 이 사건의 가해자인 60대 남성은 지난 6월19일 인천시 부평구에 사는 아내를 살해했다. 남성은 지난해 12월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받은 접근·연락 금지 명령이 해제된 지 일주일만에 아내를 다시 찾아가 살인 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살해 며칠 전에도 가해 남성이 여성을 찾아오자 여성이 “남편 때문에 겁난다”고 경찰에 도움을 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대응이 적절치 않았다는 데 있었다. 당시 피해자가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냈던 것과 달리 현장 경찰관은 보호조치 필요성을 판단하는 조사표의 ‘피해자의 불안감 호소’ 관련 문항에 ‘아니오’를 체크하면서 결국 추가 접근금지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경인일보는 경찰의 소홀한 대응과 유족을 만나 피해자가 보복 피해를 우려하며 신변보호 요청을 여러 차례 호소한 사실을 처음 파악해 보도했다. 실제 국감장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전조가 뚜렷한 긴급한 상황에 맞지 않게 임시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점, 가정폭력 재발 우려 등급을 임의로 해제한 점 등 때문에 비극을 막지 못한 것이라며 경찰을 비판했다. ‘가정폭력→살인’ 비극 막자, 국회 움직여 두 사건과 더불어 ‘친밀한 관계’의 배우자나 연인을 살해하는 비극이 끊이지 않자 이를 막고자 국회가 나섰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가정폭력 범죄의 규율 대상을 혼인 관계에서 연인 등 친밀한 관계로 확장하고 피해자 보호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의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법률안’(친밀관계폭력처벌법)을 지난 9월 발의했다. 구체적으로 이 발의안은 그간 가정폭력처벌법이 ‘가정의 유지’를 목표로 했던 점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자유로운 생활 형성과 인권 보장’에 중점을 두도록 짜여졌다. 가정폭력 사건에서 처벌 독소조항으로 꼽혔던 ‘반의사불벌’ 조항을 없애고, (긴급)임시조치의 접근 금지범위를 1㎞ 이내로 확대하는 피해자 보호조치도 담았다. 용 의원은 “동탄과 부평에서 여성이 애인과 배우자 등 남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잇따랐다”며 “피해자들이 보호받는 법 체계 작동으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상을 되찾길 바란다”고 법 취지를 밝혔다. 정부가 공적 자원을 전방위적으로 투입해 대책을 수립하는 ‘사망검토제’ 발의도 눈에 띈다. 전진숙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낸 사망검토제는 배우자 등 친밀한 파트너에게 피해자가 살해당하거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을 받은 사건을 심층 조사해 수사기관 등의 피해자 보호 절차와 처리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살피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제도다. 사건의 다층적 분석을 위해 전문가와 경찰·검찰·법원 등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검토위원회를 설치해 지원토록 하는 내용도 녹였다. 이밖에 가해자의 임시조치 종료·석방 사실 등을 피해자에게 통보하도록 하는 법안, 긴급임시조치 위반 시 현행 과태료 처분을 벌칙으로 상향해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법안 등이 발의됐다. 이를 포함해 이번 22대 국회(17일 기준)에서 가정폭력, 스토킹 처벌·보호 관련 법안을 크고 작게 개정하는 내용의 발의안은 62건이나 올라와 있다. ■ 현장 대응도 ‘변화’ 감지 경찰도 초동 대응부터 피해자 보호 조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탄 납치살인과 부평 가정폭력 살인사건 전반의 감찰로 경찰관 10여 명을 징계와 주의 처분 등으로 문책한 데 이어, 현장 대응력 강화에도 나선 것이다. 위험성 조사를 통해 재범 우려가 있는 신고 대상에 대해 긴급임시조치를 적극 적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천경찰청의 관내 가정폭력 가해자 대상 긴급임시조치 실시율(지난 11월 기준)은 올해 87.2%(2천458건 중 2천143건 적용)로 지난해 40.7%와 비교해 2배 넘게 증가했다.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데이트 폭력, 입법과 쟁점’ 토론회에 나온 여개명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과장은 “반의사불벌죄 등 법적 제한 문제를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3회 이상 신고가 접수되면 상습성을 적극 검토하고, 재물손괴와 같은 비(非)반의사불벌죄의 적용도 강조하고 있다”면서 “또한 6회 이상 반복 신고됐으나 분리나 안전조치 없이 종결된 사건의 위험성을 재점검해 스마트워치 지급 등 추가 조치를 실시하고, 수사에도 착수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각지대 메워나가야”… 남은 과제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기존 법률안의 빈틈을 메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보다 안전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서는 피해 유형과 상황 전반을 아우르는 전면 법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해당 국회 토론회에서 교제폭력을 포함한 모든 친밀관계 폭력을 규율할 수 있는 가정폭력처벌법의 전면 개정안을 제안했다. 그는 “법 시행 30년이 다 돼가지만 가정폭력 경찰 신고율은 0.8%에 불과하고,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여성 살해 피해자 가운데 39.8%는 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했다”며 “일부 조항 개정으로는 여성 폭력을 해결할 수 없고 목적조항, 친밀관계 정의규정, 형사처리절차 등의 전면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회에 제시된 법안들이 온전히 통과될지도 지켜볼 지점이다. 직전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관련 법안들은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동탄 납치살인 피해자 유가족 측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비극을 멈추기 위한 진정성을 국회가 입법으로 보여달라”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