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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북한미술 소개 '조선화의 거장展-인천, 평화의 길을 열다' 의미

임진강 너머 일렁이는 붓놀림, 한 뿌리 조선화… 예술에는 휴전선이 없다

 

이질적으로 전개되어 온 남북한 미술이 그 근원에선 하나임을 보여줄 '조선화의 거장'展이 23일 인천문화예술회관 대전시실에서 막을 올린다.

경인일보가 2019~2020년 진행한 '조선화가 아카이브'를 잇는 두 번째 프로젝트인 이번 전시는 8월 10일까지 개최된다. '인천, 평화의 길을 열다'라는 부제를 단 이번 전시에선 조선화의 대표 작가인 이쾌대, 길진섭, 한상익,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등 40여 명의 작품 200여 점을 시민들에게 선보인다.

인천 출신 월북 미술가 홍종원·변옥림 부부 작품도 전시된다. 이소영 대구대 교수가 3개 섹션으로 나뉜 전시회의 구성에 맞춰 의미를 짚어줬다. → 편집자주

 

 

북한의 미술은 조선화에서 출발하여 조선화로 귀의한다고 할 만큼 북한미술에서 조선화의 위상은 근본이자, 지향으로서 자리한다. 이 전시는 북한 초기 미술계를 선도한 미술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조선화의 거장 근원(近園) 김용준, 일관(一觀) 리석호, 청계(靑谿) 정종여의 3인 특별전과 북으로 간 18인의 미술가들 그리고 북한을 대표하는 미술가 18인의 작품 총 2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해방기 한국 미술계는 남북분단과 새로운 미술이론의 유입으로 좌우 이념이 대립하는 혼돈과 격동의 무대였다. 시대사의 격랑에도 미술인들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변혁의 의지로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이념적 이유로 북으로의 길을 선택했던 미술가들은 자신이 세운 문제의식과 신념을 북한에서도 지속하고자 했으며, 북한 미술사의 기초를 닦는 담론 형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러 논쟁에 참여해 주장을 관철하기도 하고, 때로 파국으로 귀결되기도 했던 그들의 삶과 예술의지는 남겨진 작품과 텍스트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들의 흔적은 남북을 아우르는 우리 근현대미술을 폭넓게 이해하고 확장하기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분단 후 40년 동안 언급조차 어려웠던 북녘의 미술유산들은 그로부터 거론되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남과 북은 상이한 사회적 이념과 체제에 가로막힌 채 30여 년의 시간이 하릴없이 더 흘렀다.

이번 전시는 이질적으로 전개되어 온 남북한 미술이 그 근원에서는 하나로 만나고 있음을 조명하는 자리이다. '조선화의 거장展 - 인천, 평화의 길을 열다'를 계기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새로운 상상의 밀알이 되기를 기원한다.

 

 

 

[SECTION 1]
초기 미술계 선도한 김용준·리석호·정종여 특별전
전통·개혁 앞장 서… 형식 벗어난 '문기' 스민 화풍

# 섹션 1. 조선화 거장 3인 특별전, 김용준, 리석호, 정종여


1950년대 북한에서는 민족미술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다양한 화풍이 공존했다.

강력한 선전매체로 인식되었던 유화와 조각 등의 예술형식에 비해, 동양화는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했는데, 이 시기 근원 김용준, 일관 리석호, 청계 정종여는 '조선화'의 전통과 개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북한의 초기 미술계를 선도한 인물들이다.

세 인물의 조선화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이 강하며 자유분방한 필치를 구사한다고 하여 '문기(文氣)'가 스며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김용준은 내재된 정신을 표현하는 '사의(寫意)'적 화풍으로 전통을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리석호는 김용준의 견해에 뒷받침하여 문인화와 채색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몰골법으로 시적 정서를 그려내었다.

그에 반해 정종여는 전통성과 현대성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북한미술 본류를 형성하는 채색화 중심의 조선화를 정립한다. 산수, 인물, 화조, 풍속화 등 실로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분방한 필력과 섬세한 모사력을 겸비한 화가로서 독보적이면서도 주옥같은 발자취를 남겼다.
 

 

[SECTION 2]
인천출신 홍종원 등 월북 18인 미술가 88점 조명
달라진 제2의 생애… 낭만과 고뇌에 찬 작품 감상

# 섹션 2. 낯선, 낯설지 않은


북으로 간 미술가들은 삶과 예술의 반쪽을 북에서 보냈다. 그들은 북으로 간 뒤 어떻게 됐을까? 그들의 작품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질문은 여러분을 두 번째 섹션으로 안내한다.

해방공간에서 미술인들은 여러 미술단체들을 설립하여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그중 덕수궁 소재 '서울조형문화연구소'와 서양화가 배운성이 운영한 '서울연구소'는 이후 북한미술사의 토대를 만든 인물들이 대거 관여했던 점이 특징적이다.

정현웅, 정종여, 리석호, 이팔찬, 김만형, 이쾌대, 김용준, 배운성 등 이 시기 작가들 대부분은 일본유학파 엘리트들로 남북지역을 오가며 인적관계를 형성하였다. 북한의 미술사는 사실상 이 인사들에 의해 새롭게 구축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장은 해방기와 이후 북한을 근거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북으로 간 미술가들 18명의 작품 88점을 조명한다. 제2의 생애를 보냈던 북한에서 그들이 펼친 예술의지와 낭만적이면서도 고뇌에 찬 뜨거운 가슴을 느껴보는 흔치 않은 감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인천 출신 미술가 홍종원과 변옥림

홍종원은 인천에서 정미업을 하던 집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1932년 파산한 부모님을 따라 북행길에 올라 청진으로 갔다. 죽어도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부모를 따라 다시 서울로 돌아온 홍종원은 1946년에 인천 간판점, 삼성인쇄소 등에서 화공으로 그림을 그렸다.

1947년에는 배운성이 운영하던 '운성회화연구소'에 연구생으로 있었는데 경찰의 탄압으로 연구소 운영이 중단된 후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갔다. 1948년 홍익대학 유채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중 6·25를 맞아 아내 변옥림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공훈예술가 지위를 부여받았고,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수상한 바 있으며, <뜰 앞에서>, <서울시민의 4월항쟁>, <조국을 위하여>, <녀성고사총수> 등 수십 점이 조선미술박물관과 조선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종원은 1993년 9월 아내 변옥림과 아들 홍민과 홍범, 딸 홍은경과 함께 북한미술박물관에서 북한 최초로 성대하게 '가족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SECTION 3]
인민·공훈예술가 칭호 수여 거장들 대작 선보여
한민족의 근원 찾아가는 '공통 분모' 발견 기회

# 섹션 3. From KOREA To KOREA


북한의 미술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일까? 우리의 미술과는 얼마나 닮았고, 또 얼마나 다를까? 단 한 번의 붓질로 사물의 형태나 색상, 질감까지 표현해내는 몰골법의 사용을 두고 북한은 30년 동안 논쟁해왔다.

서정성과 강렬한 색채는 다른 문화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정물화와 풍경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세 번째 섹션은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은 북한 최고 미술가들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조국산천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실감나게 그린 북한 미술가들의 풍경화를 보고 있노라면, 동일한 뿌리에서 자라난 한민족의 근원을 찾아가는 공통분모에 조선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예술에는 휴전선이 없다. 이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구축한 북한만의 미감에 주목할 시간이다.

/이소영 대구대 교수

 

■이소영 대구대 교수는

 

이소영은 국내외 21회의 개인전과 200여 회의 단체전 및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였다.

유네스코 책의 수도 선정 기념전-문학 속 인천展 등 다수의 전시기획, 아시안게임 경기장 작품공모 선정, 국립현대미술관·인천문화재단 등 작품소장,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사업 선정 등 작품제작과 저술활동을 병행해왔으며, 현재는 대구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