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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이병철의 인사이트] 끝나지 않은 황령산 '맹물온천'의 악몽

 

1995년 8월 부산 수영구청 주차장. 황령산 온천 개발 회사 직원과 마주쳤다. “반갑다”며 차 트렁크를 열고 ‘발렌타인 30년’ 위스키를 상자째로 건네려던 그를 제지하면서 “왜 저럴까”란 의문을 가졌다. 이런 호기심은 며칠 뒤 황령산 남서쪽을 파헤쳐 놓은 건설 현장으로 발품을 팔게 했다.

 

찢어질 듯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네던 임원과 옥신각신하는 사태를 벌인 뒤, 기자의 동물적 감각은 ‘뭔가 있다’였다. 대덕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부경대 정상용 교수 등과 6개월간의 취재 끝에 1996년 2월 21일 ‘황령산 온천은 맹물온천’이란 〈부산일보〉 탐사보도로 폭로됐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부산의 허파’인 황령산을 ‘온천 개발’이라는 핑계로 파헤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도심녹지 보전은 당연한 시대정신

800억 원대 징벌적 소송까지 거친

황령산 온천 백지화는 시민사회 승리

자연환경은 공공재, 시민 모두 재산

25년 전 심은 묘목 참나무 숲 이뤄

랜드마크보다 시민 행복이 부산 매력

 

부산일보가 재벌그룹이 개발의 배후라는 점과 정치권 실세의 비자금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흘러들어온 의혹까지 보도하자 개발업자는 부산일보와 기자를 상대로 800억 원의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결혼 2년 차였던 기자의 17평짜리 신혼집도 가압류했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징벌적 언론소송’이었다. 개발업자와 정치권, 재벌에 의한 한국 언론 사상 최대인 800억 원대 소송전과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황령산 맹물온천’ 사건은 전국 이슈로 부상했다. 대학교수, 종교계, 한국기자협회, 관훈클럽 등이 연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당시 부산환경운동연합과 늘푸른시민모임 이성희 사무국장 등 62개 시민사회단체가 ‘황령산살리기 비상대책회의’를 꾸렸다.

 

25년 전 안개 자욱한 황령산 봉수대에 전국의 종교계와 시민단체, 부산일보 노조까지 붉고 푸른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반대 시위를 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정한상 부산일보 사장이 정서환 사회부장과 사건팀장, 막내인 기자를 범일동 초밥집으로 불러서 “공익 목적과 사실관계가 맞으면 써라. 공공재인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신문사의 힘은 글과 지면밖에 없지 않으냐”며 격려하시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정한상 사장, 정서환 사회부장, 이성희 국장, 1년간 진행된 소송과 검찰 소환 조사에서 후배 옆을 지켜줬던 이현 기자 등은 유명을 달리했지만, 도심녹지와 황령산을 보전하려는 시대를 앞섰던 그들의 의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시민사회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개발업자와 재벌그룹은 사업과 소송을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관광과 온천개발’을 빌미로 도심 녹지를 파괴하려던 부동산 개발 시도는 무산됐다. 시민의 승리였다.



 

 

그런 승리와 황령산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0년 뒤인 2007년 ‘훼손된 산지를 복구하고,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명분으로 실내 스키돔이 세워졌다가 1년 만에 부도났다. 13년 뒤인 최근, 또 다른 개발사업자와 취임 5개월 차 박형준 부산시장이 황령산을 부산 관광의 랜드마크로 탈바꿈하겠다는 명목으로 ‘황령산 스노우캐슬 정상화 사업’ 업무협약을 맺고 정상에 ‘봉수전망대’ 조성을 시도하고 있다. ‘스노우캐슬 정상화 사업’ 어디에도 흉물이 된 스키돔 환경복원 계획은 찾기 어렵다. 멀쩡한 봉수대와 산 정상에 전망대와 컨벤션전시홀, 음식문화체험관, 복합문화예술공유센터를 설치한다는 계획뿐이다. 전망대 옥상 아래에 ‘시그니처 레스토랑’이 설치돼 부산을 내려보며 세계적인 셰프의 정찬(Fine Dining)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친환경적 설계. 랜드마크, 관광객 500만 명 방문’ 등 고장 난 전축처럼 맹물온천, 스키돔, 엘시티 개발에서도 나왔던 ‘흘러간 옛 노래’가 되풀이되고 있다. 25년이 지나서도 이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부산 남구 문현동에서 황령산 바람고개를 거쳐 안창약수터로 향하는 편백 숲 곳곳에는 평상이 마련돼 있다. 그 숲에는 부산 시민들이 3000원짜리 김밥을 먹으면서 내뿜는 행복과 피톤치드 향이 가득하다. 주변 눈치를 보며 살얼음 낀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면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행복하다. 1996년 부산일보에서 열린 ‘황령산 부산시민 공청회’에서 임호 전 부산발전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자연환경은 공공재로서 모두의 재산이다. 제한된 계층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면 공공성을 침해한다. 시민은 공공재인 황령산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 실천하고, 불탄 자리에는 스스로 나무를 심고, 날마다 이 산에 올라 주인임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정상에는 25년 전 유치원생들이 ‘황령산 보전 염원’을 담아 심은 참나무 묘목이 청년이 된 그 아이들처럼 아름드리나무로 자랐다. 그들에게 그 나무를 베어야 한다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민의 행복, 부산의 매력은 편하게 걷고, 숨 쉴 수 있는 황령산 도심 숲과 김밥 한 줄이면 충분하다. 시대를 거꾸로 그리면서 어떻게 도시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