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산청군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28일로 100일을 맞는다. 4명의 목숨과 3397㏊의 숲을 앗아간 그날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는 매캐한 내음과 황량하게 타버린 마을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참혹했던 화마의 현장을 다시 찾았다.

불길 휩쓴 산등성이
앙상한 나무들로 뒤덮여
벌채목 쌓여 상처 여전
탄내 자욱했던 땅에선
풀내음·새순 돋아나고
멧돼지·고라니 돌아와
“푸른빛 띠지만 회복 아직
예전 모습 되찾으려면
땅 체질부터 바꿔나가야”
◇여전한 잿빛과 트라우마 위에도 초록이 핀다= 지난 25일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 석 달 전 불길이 휩쓸고 간 산등성이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산으로 이어지는 마을 오르막길 돌담은 여전히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집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는 불에 녹아 뒤엉킨 비닐이 칭칭 감겨 있고, 흔적 없이 사라진 집 마당의 타다 만 감나무는 밑동만 남았다.
함께 마을을 둘러보던 이장 김원중(52)씨는 “그날 이후 마을 회관 스피커를 켜기만 해도 어르신들은 깜짝깜짝 놀란다”며 여전히 남아있는 그날의 충격을 전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인근의 중태마을. 중태천을 따라 일자로 길게 뻗은 마을엔 벌채한 피해목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대부분 소나무다. 불에 탄 나무를 옮기기 위해 굴착기와 트럭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손경모(66) 이장은 “소나무가 밀집한 곳은 나무들이 대부분 검게 타 죽었는데 활엽수들이 모인 쪽은 비교적 멀쩡하다”며 “마을 뒤편 숲은 오래 전부터 소나무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게 도리어 불을 키운 것 같다”고 했다.

불탄 산등성이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연녹색 점들이 보였다. 외공마을 입구부터 풍겨오던 탄내와 폭삭 내려앉은 집의 잔해는 사라졌다. 담벼락 사이에서 불길의 흔적을 휘감고 있던 대나무와 감나무들도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연녹색 풀들이 들어섰다. 매캐한 탄내가 자욱했던 마을엔 풀 냄새가 묻어 났다. 잔해를 치워낸 터 위로 상추를 심었고, 그을린 은행나무는 조금씩 새순을 돋우고 있다.
길가에서 잡초에 약을 치던 후평마을 주민 이모(59) 씨는 숲의 재생을 반겼다. 그는 “시커멓게 탄 소나무들은 석 달 전과 달라진 게 없지만, 땅에선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며 “산불이 났을 때 보이지 않던 멧돼지와 고라니도 어느새 돌아와 밭을 파헤치고 다닌다”고 말했다.


◇회복이 다른 두 숲= 외공마을을 가로지르는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르자 숲으로 접어드는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왼쪽은 감나무와 밤나무가 가득한 활엽수림이, 오른쪽엔 소나무가 무성한 침엽수림으로 이어진다.
좁은 길 하나를 두고 떨어진 두 숲은 확연히 달랐다. 불길이 닿은 감나무와 밤나무가 겉이 일부분 그을려진 듯한 모습이라면, 소나무는 전체가 숯처럼 퍼석하게 구워진 듯 보였다. 감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잡아당기자 질퍽하게 뜯어졌고, 소나무의 껍질은 부서지듯이 떨어져 나갔다.
생명이 돌아오는 속도도 다르다. 감나무와 밤나무 숲엔 새롭게 태어난 풀들이 정강이까지 자랐고, 소나무 숲은 초록의 풀들이 군데군데 솟아 오르지만 그을린 나뭇가지와 짙은 색의 흙이 대부분이다.

경상국립대학교 환경산림과학부 안지영 교수는 “봄철에 활엽수에 비해 잎이 많고 불에 잘 붙는 송진을 갖고 있는 소나무가 불을 키우는 연료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활엽수의 대표적인 참나무류는 바깥쪽 껍질인 수피 부분이 침엽수에 비해 두꺼워, 불이 안쪽 형성층까지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대로 두면 숲과 마을은 예전 모습을 되찾게 될까. 불길이 휩쓴 뒤 숲을 찾은 안 교수는 “아니”라고 답했다.
안 교수는 “산불이 꺼지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여러 개의 가지가 자라나는 등 겉으로 봤을 때 푸른 빛을 띠지만 그건 산림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없다”며 “방치한다면 산림으로의 역할을 해낼 수 없는 산이 되고 만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타버린 땅의 체질을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 이전의 녹음으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