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 호미를 씻다
초가을 햇살 아래에서, 호미를 씻는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밭고랑, 이랑 넘나들며, 온갖 잡초 걷어내고 뽑아내느라, 흙먼지 켜켜이 내려앉은 기역자 호미들, 내내 기특하면서도 짠했다. 간만에 물로 씻어 창고에 내걸고 나니, 덩달아 몸과 마음 가볍고 개운하다 호미는, 농부와 한 몸이다. 농작물들을 지켜 내는 최전선의 불침번들이다. 일 년 농사 절반이, 잡초들과의 지난(至難)한 싸움 아니던가. 애지중지 보살핌받는 작물들과, 호시탐탐 작물들 몫의 자양분들 엿보는 천덕꾸러기 잡초들과의 ‘오징어 게임’. 생존을 건 ‘치킨게임’이라, 추호도 양보할 수 없다. 그런데 기다리던 택배처럼, 휴전의 시간이 왔다. 서늘해진 기온에 잡초들 시름시름 드러눕기 시작하고, 제초의 고단함으로 농부들이 탈진 직전 그 어간(於間), 음력 절기상 처서(處署) 즈음의 ‘호미씻이(세서연/洗鋤宴)’가 바로 그 때이다. 제초 부담 덜하니, 일 년 중 가장 한가하다. 말 그대로 ‘어정 칠월, 건들 팔월’. 어정거리며 칠월 보내고, 건들거리며 팔월 보내는 농한기인 것이다. 중노동의 농번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노동 단계로 진입하는 전환점. 전반부의 재배기에서 후반부의 수확기로 옮겨가는 과정에 설정된, 시간적
- 고권일 / 농업인 · 삼성학원 이사장
- 2022-10-25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