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지정면 안창리 밭 가운데 우뚝 솟은 삼층석탑 뒤편으로는 몸돌 잃어버린 진공대사탑비 남아있어 고려 태조가 글 짓고 당 태종의 글씨 모아 새긴 비석 고려~조선 후기 시문·지리서 등에 언급 많았던 연유 흥법사 폐찰 후 조각나 방치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인근 민가·농지서 기와 출토 … 당시 사찰 규모 짐작 원주 지정면 안창리로 향했다. 안창대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에 흥법사지 안내판이 보인다. 앞쪽으로 섬강이 흐르고 뒤편에 영봉산이 아늑하게 감싸는 곳에 절터가 자리를 잡았다. 높은 축대는 성곽처럼 견고하게 보인다. 축대 뒤편으로 펼쳐진 밭 중앙에 삼층석탑이 우뚝하다.석탑 뒤편으로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받침돌의 머리는 거북이라기보다 용에 가깝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과 부라린 눈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다. 땅바닥을 딛고 있는 네 발은 힘이 넘쳐난다. 정육각형 안에 만(卍) 자와 연꽃을 새긴 등껍질은 섬세하기 그지없다. 머릿돌은 기운생동하는 용틀임이다. 구름 속에서 다투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은 비늘마저도 꿈틀거린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네 마리가 양 귀퉁이에서 노려본다. 뒷면에도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전서체로 쓴 글씨는 진공대사라는 네
'허난설헌·허균' 동생들 명성에 뒤지지 않았던 빼어난 시인 '허봉' 승승장구하다 탄핵·유배…풀려난 뒤 방랑하다 생창리서 생 마감해 병자호란 당시 2천의 병사와 김화 지키다 쓰러진 평안감사 '홍명구' 전쟁터에 세워진 충렬사…DMZ생태평화공원 트레킹 코스 경유지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가 어느 날 문득 다가왔다. 허봉(許 ·1551~1588년)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서른여덟에 그는 눈을 감아야 했다. 그가 김화현의 생창리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는 글을 읽는 순간 예전의 생창리가 아니었다. 여동생이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년)이고, 남동생이 허균(許筠·1569~1618년)이라고 소개해야 할 정도로 동생들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그는 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정도가 아니었다. 스물둘에 문과에 급제했고, 총명한 자만 선발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가를 주는 사가독서에 뽑혔으며, 승진을 계속했다. 승승장구하다 병조판서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했다가 유배됐고, 풀려나 방랑하다가 생창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양경우(梁慶遇·1568∼미상)는 장유(張維)가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논하면서 '근래의 문인재자 중에 허봉의 시가 으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