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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 [조선시대 핫 플레이스, 강원의 명소는 지금]김화 벌판서 순국한 홍명구 장군과 당대 문장가인 허봉의 넋이 서린 땅

(2)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허난설헌·허균' 동생들 명성에 뒤지지 않았던 빼어난 시인 '허봉'
승승장구하다 탄핵·유배…풀려난 뒤 방랑하다 생창리서 생 마감해
병자호란 당시 2천의 병사와 김화 지키다 쓰러진 평안감사 '홍명구'
전쟁터에 세워진 충렬사…DMZ생태평화공원 트레킹 코스 경유지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가 어느 날 문득 다가왔다. 허봉(許 ·1551~1588년)의 죽음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 서른여덟에 그는 눈을 감아야 했다. 그가 김화현의 생창리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는 글을 읽는 순간 예전의 생창리가 아니었다.

여동생이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년)이고, 남동생이 허균(許筠·1569~1618년)이라고 소개해야 할 정도로 동생들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그는 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정도가 아니었다. 스물둘에 문과에 급제했고, 총명한 자만 선발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가를 주는 사가독서에 뽑혔으며, 승진을 계속했다. 승승장구하다 병조판서 이이(李珥)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했다가 유배됐고, 풀려나 방랑하다가 생창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양경우(梁慶遇·1568∼미상)는 장유(張維)가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논하면서 '근래의 문인재자 중에 허봉의 시가 으뜸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허봉의 '하곡유고(荷谷遺稿)' 한 권을 구해 늘 손에 들고 탐독했는데 진실로 뛰어난 시재였다고 탄복한다. 격조가 높기는 허난설헌과 같았지만 허탄한 병통은 없고, 아우 허균은 재주가 넉넉하여 다함이 없지만 격률은 몹시 비루하니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평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양경우는 허봉의 시가 동생들보다 뛰어났다고 봤다.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임금의 명령 때문에 서울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허봉은 세상과 어긋나기만 하자 불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사명당과 교리를 논하기도 했다. 금강산 대명암에서 한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1585년 풀려나와 인천·춘천 등에서 방랑하다가 1588년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병이 나자 치료하려고 서울로 향하던 길에 생창리에 들렀다. 숨을 거두자 친구인 김화현감 서인원이 그를 거둬 아버지 곁에 묻었다. 무심히 지나치던 생창리에서 허봉이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어찌 생창리가 예전의 생창리겠는가. 숱한 접경지 마을 중 한 마을이 아니라 허봉의 이야기를 지닌 공간이 됐다.

김화읍에서 남쪽으로 2리쯤 떨어진 곳에서 조선군과 청군이 싸우기 시작했다.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는 2,000명의 병사와 함께 전사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의 군대는 대승을 올리고 시체를 모두 거두어 태웠는데 3일이 걸릴 정도였다. 후에 전쟁터에 충렬사를 건립해 홍명구와 유림을 모셨고, 사당 옆 전각에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를 세웠다.

김화를 지나던 문인들은 사당에 들르곤 했다. 선비가 나라의 녹을 먹게 되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평화로울 때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매진해야겠지만 나라가 위급할 때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한다. 홍명구는 김화 벌판을 채운 적을 보고서도 추호의 흔들림이 없었다. 단상에 올라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은 서생의 모습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의 기상이었다. 적군의 칼날이 벌판을 가득 채웠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초연했다. 2,000명 병사와 함께 김화를 지키다 쓰러진 홍명구는 전형적인 조선의 벼슬아치였다. 사당 뒤편의 잣나무는 홍명구와 함께 산화한 병사들처럼 보였다. 이후 많은 문인이 이곳에 들러 술을 따르고 시를 지었다.

겸재 정선은 전쟁터에 들러 '화강백전(花江栢田)'을 그렸다. 김화를 휘도는 강물이 화강(花江)이다. 백전(栢田)은 잣나무 밭이다.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그린 것이 아니라 장렬하게 순국한 넋을 기리기 위해 전쟁터를 화폭에 담았다. 짙은 먹으로 꾹꾹 눌러 표현한 잣나무 잎은 적을 향해 부릅뜬 눈이다.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의 굳센 의지다. 물샐틈없이 빽빽한 수직의 나무는 뚫리지 않으려는 병사들의 몸짓이다.

김화읍 생창리에 있는 DMZ생태평화공원은 트레킹 코스를 두 개 개발했는데, 그중 제2코스는 충렬사를 경유한다. 용양보와 암정교 등도 함께 걸을 수 있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