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민성 시인은 1927년 3월 3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서 태어났다. 부안공립보통학교와 전주북공립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죽산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문학의 꿈을 키우기 위해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틈틈이 습작한 시를 발표해오다 1960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인은 평생 시를 쓰면서 살았다. 1986년 첫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를 낸 이래 2002년 『황혼의 숨결』까지 열한 권의 시집과 다섯 권의 산문집을 냈다. 시인은 1978년에서부터 1992년까지 부안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정년 후에는 낭주학원이사장, 부안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문학과 향토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비롯한 허난설헌문학상, 백양촌 문학상, 교육부장관상, 목정문화상, 세계시황금왕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부안의 선은 마을은 선조들이 누대를 이어온 곳으로 시인은 유복한 가운데 가통(家統)이 뚜렷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늘 성품이 곧고 ‘겸손’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왔기에 그를 아는 문인들과 고향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맏형’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비적 품격과 기질, 정중함은 시인을 회억할 때마다 누구나 떠올리는 말이라고 한다. 그의 수필집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글, 1996)에 나오는 ‘24개의 창’에는 크고 넉넉했던 집안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부안의 선은 마을은 선조들이 누대를 이어온 곳으로 시인은 유복한 가운데 가통(家統)이 뚜렷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늘 성품이 곧고 ‘겸손’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왔기에 그를 아는 문인들과 고향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맏형’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비적 품격과 기질, 정중함은 시인을 회억할 때마다 누구나 떠올리는 말이라고 한다. 그의 수필집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글, 1996)에 나오는 ‘24개의 창’에는 크고 넉넉했던 집안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특히, 첫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친우,1986)는 시인이 문단 데뷔 26년 만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성품과 치열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어설피 양산(量産)해서 자꾸 내던지는 경망을 피하고 신중하고 겸허하며 차근차근 다지면서 꾸준하게 이루고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가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인의 겸허한 자기성찰(自己省察), 그리고 정중한 내면 구성, 은은한 자기 노출이 드러난다(이병훈, 「차근차근한 자기성찰」, 첫 시집 발문)는 평가를 받았다.
‘저는 가만가만 술청을 나와 길모퉁이의 쓰레기장에서 하늘을 하늘이게 하고 땅을 땅이게 하고 빌다가 「로이도」 0도의 안경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쳐버렸습니다. 부서진 안경알의 파편 속에는 꽃과 바람과 뉘우침과 조소와 그런 것들이 함부로 함부로 우쭐대고 있었고 저는 견디다 못해 도망쳐 겨울나무 뒤에 숨어 버렸습니다.’ -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의 시 <도(禱)>의 일부-
이 시에 담긴 철저한 자성(自省), 이것은 김민성 시인의 일관된 시 정신이며 삶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깨어진 안경알, 그리고 그 속에 펼쳐진 풍경(風景), 그것은 단순한 유리의 파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과 바람과 뉘우침’이라는 인식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저는 가만가만 술청을 나와 길모퉁이의 쓰레기장에서 하늘을 하늘이게 하고 땅을 땅이게 하고 빌다가 「로이도」 0도의 안경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쳐버렸습니다. 부서진 안경알의 파편 속에는 꽃과 바람과 뉘우침과 조소와 그런 것들이 함부로 함부로 우쭐대고 있었고 저는 견디다 못해 도망쳐 겨울나무 뒤에 숨어 버렸습니다.’ -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의 시 <도(禱)>의 일부-
이 시에 담긴 철저한 자성(自省), 이것은 김민성 시인의 일관된 시 정신이며 삶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깨어진 안경알, 그리고 그 속에 펼쳐진 풍경(風景), 그것은 단순한 유리의 파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과 바람과 뉘우침’이라는 인식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고향 부안은 문학과 예술이 뛰어난 고장이다. 매창(梅窓)의 아름다운 노래가 언제나 석동산 자락을 감돌고 있으며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뒤란의 대나무 숲과 어우러져 언제라도 시심을 일렁이게 한다. 시인은 평생 이처럼 아름다운 부안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부안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서 부안을 노래했고, 부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았다. 그의 시집마다 부안과 변산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오오 변산이여』을 비롯하여 『파도가 밀려간 뒤』, 『바다 우는 소리』, 『동진강 아으리랑』에는 부안과 변산에 대한 사랑이 동진 들녘의 잘 익은 벼 이삭처럼 풍성하다. 특히 신석정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는 특별한 큰 북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좋아 석정의 문하를 들락거렸고 석정을 따라 인생과 자연을 사랑하며 한 시대를 살았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의 석정 시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김민성의 시는 어쩌면 동류의 교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석정 시인과 함께 ’부안문화연구회‘를 만들어서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1960년 이후 석정이 전주로 이사하자 그 빈자리를 메워가면서 부안 문학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1961년에는 매창(梅窓)을 상징하는 ’이화우‘라는 이름을 따서 ’이화우동인회‘를 창립하여 부안 문학을 활성화했다. 또한, 신석정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허소라, 이기반, 황길현, 이병훈 등과 함께 석정문학회를 만들어서 석정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바다 3
바다는 앙금을 남길 줄 모르는 걸음걸이로
와서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린 것 모두
버릴 것 모두
모두를 파묻어 버린다.
떠나가 버린
지난여름 이야기들
떠내려간 상처 많은 사람들
눈물나는 후회를 모두 흘려버리고
혼자서 깊어만 간다.
흐르면서 흐르지 않은 생각
얼마나 많은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훌훌 씻어버리고
내처 달려 온
머나 먼 여로인가
아무도 범하지 못하는 성역에
나의 눈물과 시름을 기대고
오늘은 새초롬히
하나님 같은 그대 앞에 엎디어
불 같은 기도를 올린다.
-김민성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 <바다3>의 전문 -
시인은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에는 ’바다‘의 연작시 40편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 첫머리 자서(自序)에서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보다, 귀가 먹어버린 바다이어도 바다를 만나는 행복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바다를 통해서 인생과 삶을 반추하고 늘 거듭나고자 하였다. 시인에게 ’바다‘는 ’자기응시‘였고 ’자기성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정년퇴임 이후 부안문화원 원장직을 기꺼이 수락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비를 출연하여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부안의 곳곳에 어린 문화와 예술의 맥을 찾아 숨 쉬게 했다. 특히 “산과 들과 바다가 알맞게 교직(交織)되어 선경(仙境)을 이루고, 거기에 멋과 노래와 예술이 넘쳐나는 고장”에 관한 시문(詩文)을 망라하여 『영혼을 울리는 노래, 扶安의 詩』(부안문화원, 1999)를 엮어내기도 했다. 시인은 그이 마지막 시집 『황혼의 숨결』에서는 “황혼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그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어도 병들어 부서지는 몸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고향 부안을 관통해 흐르는 동진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기를 소망했다.
2002년 초여름 갑작스럽게 찾아온 췌장암. 수습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창작에의 열정을 접지 않았다. 시인의 일흔일곱 해 생애는 계미년이 시작되는 시간에 멈추었다. 그러나 시인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땅에서 태어났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학과 고형은 시인의 궁극적인 삶의 가치였고 목적지이고 희망이었다. 이기반 시인의 말처럼 “웅성 깊은 고향 사랑과 정중한 인간애”는 그의 모든 시문의 행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이 떠난 뒤, 윤갑철, 양규태 등 부안의 문우들은 범영 김민석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자 십시일반 뜻을 모아 바다가 보이는 변산의 문학동산에 시비를 세우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2008년에는 고향의 후배들이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해놓아야 한다면서 신인의 고향 마을 선은리에도 시비를 세웠다. 한평생 시와 고향 부안(扶安)을 사랑했던 범영 김민성은 오늘도 고향의 새가 되어 변산반도에서 동진강까지 훨훨 날고 있을 것이다.
-오오, 변산이여
변산에 해가 저문다
긴 밤이 오겠지
그러나 또 다른 새벽이 찬란히 트이겠지
산이 높고 짚은 데도
왜 당신은 빈 마음으로 오십니까
바다가 넓고 푸른 데도
왜 당신은 빈 손으로 오십니까
그저 오르고
그냥 돌아가기만 하다가는
산이나 바다는 너무나 길고
당신은 너무나 짧습니다
들판이 거칠고 메말랐으면
그만큼 일구고 가꾸어 나갑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도
자연과 함께
역사와 함께
걸어갈 게 아니겠습니까.
-김민성의 시 <오오 변산이여> 전문
부안 변산 문학공원 시비에서
/송일섭 전북문학과 학예사
-바다 3
바다는 앙금을 남길 줄 모르는 걸음걸이로
와서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린 것 모두
버릴 것 모두
모두를 파묻어 버린다.
떠나가 버린
지난여름 이야기들
떠내려간 상처 많은 사람들
눈물나는 후회를 모두 흘려버리고
혼자서 깊어만 간다.
흐르면서 흐르지 않은 생각
얼마나 많은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훌훌 씻어버리고
내처 달려 온
머나 먼 여로인가
아무도 범하지 못하는 성역에
나의 눈물과 시름을 기대고
오늘은 새초롬히
하나님 같은 그대 앞에 엎디어
불 같은 기도를 올린다.
-김민성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 <바다3>의 전문 -
시인은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에는 ’바다‘의 연작시 40편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 첫머리 자서(自序)에서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보다, 귀가 먹어버린 바다이어도 바다를 만나는 행복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바다를 통해서 인생과 삶을 반추하고 늘 거듭나고자 하였다. 시인에게 ’바다‘는 ’자기응시‘였고 ’자기성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정년퇴임 이후 부안문화원 원장직을 기꺼이 수락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비를 출연하여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부안의 곳곳에 어린 문화와 예술의 맥을 찾아 숨 쉬게 했다. 특히 “산과 들과 바다가 알맞게 교직(交織)되어 선경(仙境)을 이루고, 거기에 멋과 노래와 예술이 넘쳐나는 고장”에 관한 시문(詩文)을 망라하여 『영혼을 울리는 노래, 扶安의 詩』(부안문화원, 1999)를 엮어내기도 했다. 시인은 그이 마지막 시집 『황혼의 숨결』에서는 “황혼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그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어도 병들어 부서지는 몸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고향 부안을 관통해 흐르는 동진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기를 소망했다.
2002년 초여름 갑작스럽게 찾아온 췌장암. 수습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창작에의 열정을 접지 않았다. 시인의 일흔일곱 해 생애는 계미년이 시작되는 시간에 멈추었다. 그러나 시인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땅에서 태어났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학과 고형은 시인의 궁극적인 삶의 가치였고 목적지이고 희망이었다. 이기반 시인의 말처럼 “웅성 깊은 고향 사랑과 정중한 인간애”는 그의 모든 시문의 행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이 떠난 뒤, 윤갑철, 양규태 등 부안의 문우들은 범영 김민석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자 십시일반 뜻을 모아 바다가 보이는 변산의 문학동산에 시비를 세우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2008년에는 고향의 후배들이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해놓아야 한다면서 신인의 고향 마을 선은리에도 시비를 세웠다. 한평생 시와 고향 부안(扶安)을 사랑했던 범영 김민성은 오늘도 고향의 새가 되어 변산반도에서 동진강까지 훨훨 날고 있을 것이다.
-오오, 변산이여
변산에 해가 저문다
긴 밤이 오겠지
그러나 또 다른 새벽이 찬란히 트이겠지
산이 높고 짚은 데도
왜 당신은 빈 마음으로 오십니까
바다가 넓고 푸른 데도
왜 당신은 빈 손으로 오십니까
그저 오르고
그냥 돌아가기만 하다가는
산이나 바다는 너무나 길고
당신은 너무나 짧습니다
들판이 거칠고 메말랐으면
그만큼 일구고 가꾸어 나갑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도
자연과 함께
역사와 함께
걸어갈 게 아니겠습니까.
-김민성의 시 <오오 변산이여> 전문
부안 변산 문학공원 시비에서
/송일섭 전북문학과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