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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문화, 역사를 말하다·(6)] 화성 발안의 '마을방'에서 탄생한 소설… 이문구의 '우리동네'

'무너져가는 농촌' 의 김씨, 이씨… 사랑방 술상에 이야기판 차렸다

 

 

나는 놀던 물을 만난 것처럼 발안이 마음에 들었다.
와서 한구석에 끼어 살았으면 싶었다.
장터를 지나가는 내에 붕어와 피라미가 은어 떼처럼 반짝이는 것이
어려서의 한내(大川)를 떠올리게 하면서 향수를 자아냈다.
(중략) 동네가 어떤지, 집이 어떤지 가 보지도 않은 채로,
장차 아니 곧 그 동네의 주민이 되기로,
가다 말고 중도에서 선뜻 결정을 해 버린 것이었다.
-이문구 '외람된 희망' 중에서

 

우리에게 '관촌수필'로 잘 알려진 작가 이문구. 그는 한국농촌과 농민이 겪는 문제를 소설로 다뤄낸 대표적인 농촌(농민)소설작가이다.

 

충남 보령 출신인 그는 소설에서 풍부한 충청도 지역어를 쓰며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모습, 그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1977년 별안간 화성 발안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이웃사촌의 깊은 정을 나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낸 작품이 바로 '우리 동네'이다.

 

'우리 동네'는 197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차츰 활기를 잃고 무너져 가는 농촌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김씨', '이씨', '최씨' 등 여러 성씨(姓氏)를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린 연작소설이다.

 

"한 번 소설을 읽어 보라구. 거기에 주민들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 얼마나 재미있다고." 당시 발안에서 이문구를 만난 이웃이 말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문구가 화성 발안으로 온 까닭

 

이문구가 화성 발안으로 내려온 1977년 전후의 시간은 그에게 피로감이 쌓였던 시기이다. 우익문단, 진보진영 할 것 없이 시대의 탄압은 이어졌고 많은 작가가 쫓기거나 갇혔다. 경제적·심리적, 문단 내외적으로 힘든 시간을 가졌던 이문구에게는 쉼이 필요했고, 그런 그가 화성으로 이끌리듯 내려왔다.

당시 발안에 살던 오익선(85)씨는 이 시기 발안 천주교 성당에서 농민교육을 하고 있었다. 보건복지부에서 가족계획시범지역으로 발안을 지정했는데, 보건진료소장으로 소설가 박광서씨가 부임했다.  

 

'시대의 탄압기'… 1977년 행랑채만 있는 헌집 이사
이리가도 저리가도 사람과 부대끼는 인심좋은 동네

 

박씨와 인연을 맺게 된 오씨는 두 달에 한 번씩 찍어 내던 소식지의 기고를 부탁했고, 그 와중에 이문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가 살 집을 하나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오씨는 "누가 행랑채만 있는 헌 집 하나를 40만원에 팔았다. 그 정도 가격이면 괜찮았다"며 "그 집을 소개해서 이문구씨가 이사 오게 됐다. 인사를 왔는데 참으로 다정했다"고 전했다.

오씨는 "(첫인상이)넙적하고, 털털했다. 입도 크고. 성격이 좋아서 누구와도 대화를 잘했다"고 이문구를 기억했다. 자연부락이라 한동네, 한동네씩 뭉쳐 사는데 이문구의 집이 있던 곳은 비교적 이웃끼리 집이 가깝게 붙어 있었다고 한다.

오씨는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사람과 부대끼는 동네인데 누구나 와도 며칠만 지나면 허허 웃는다. 어르신 생신날에 이 집 저 집 부르고, 품앗이 일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렇게 인심 좋고 사람이 좋았던 동네였다"고 떠올렸다. 아마도 이문구가 이곳을 좋아한 이유였을 것이다.
 

마을방에서 태어난 '우리 동네'

 

서슬 퍼런 유신, 누구든 말하기 꺼리는 시대적 상황에서 이웃 간에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다. 이를 깨기 위해 이문구는 마을방을 열었다.

전상기 문학평론가는 "이문구 선생님의 집이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당대 농촌의 생생한 현장 소식은 선생님 댁의 건넌방에서 청년회원들과 매월 두세 차례씩 가진 모임에서 얻은 정보와 사정들, 선생님과 사모님이 마을 행사에 참여하고 이웃들의 농사일을 거들며 돈독히 쌓으신 정으로 얻고 들으신 내용들, 시장과 읍내에서 날아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풍문 등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마을방의 이야기는 이문구의 산문집 '외람된 희망'에도 나와 있다. 마을방을 열기 위해서는 우선 장정 십여 명이 밤늦게까지 능히 먹고 마실 수 있는 술과 안주, 과일, 담배를 준비해야 했다.

안주는 돼지고기나 생선 찌개를 위주로 했으나 매번 같은 것을 내놓지 않기 위해 수원까지 나가 장을 보기도 했다. 그는 해거름 녘부터 사랑방에 군불을 때고, 방 한가운데에는 화롯불을 뒀다.  

 

청년회원과 매달 두세차례 모임·시장 풍문 등 모아
망년회·농협에 적대감·농한기 도박… 현실 그대로
이문구 "서울온지 13년… 발안은 여전히 '우리동네'"

 

따뜻하고 푸근한 기운이 감돌 때 술상이 들어오고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들은 함께 시국을 걱정하고 세태를 비웃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수없이 부엌을 드나들며 두 아이까지 돌보는 수고를 말없이 감내해 준 아내의 역할이 컸다.

이문구는 "연작소설 '우리 동네'는 그 마을방 그 화롯불 옆에서 술이 깬 다음 날 태어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문구와 '우리 동네'가 남긴 것

 

우리 동네 소설을 읽으면 마치 글을 통해 농촌의 구석구석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당시 농촌의 모습을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모아 다각도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관촌수필'을 쓴 이후 이문구는 발안에 와서도 여전히 농촌이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느꼈다.

 

 

소설 속 배경은 충청도이지만 발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루두루 참고했고, 농촌의 실상을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표현했다. 소설에는 농촌 아이들에게까지 번진 망년회, 조미료 중독, 공장의 노사 문제와 얽힌 농민 생활, 중개상으로 전락한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적대감, 농한기의 도박 풍조 등 나날이 변해가는 농촌 현실이 담겨있다. 

 

오씨는 "당시에는 농사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땅도 내놔야 하고, 외국에서도 안 먹는 쌀을 농사지어 수확하라고 내밀기도 했다. 울타리 개량하라, 지붕 개량하라, 농사짓느라 진 빚의 이자를 갚느라 시달렸다. 농촌을 들볶았다"고 회상했다.

전상기 문학평론가는 "시골청년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쓴 것이 우리 동네"라며 "이 소설은 산업화 이후 그나마 겉치레로 남아있던 농촌이 새마을 운동으로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그려내 더욱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뒤로하고, 이문구가 서울로 다시 이사를 하던 1980년 11월 이삿짐도 싣기 전에 마을 주민들이 모였다. 이들의 손에는 찹쌀, 팥 자루, 고구마, 무 등 선물이 가득했다. 그동안 좋아했던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떠난다고 하니 당연히 섭섭했지. 갈 때 시장에서 닭을 튀겨 소주 두 병 갖고 가 잠시 붙잡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렇게 떨어지면 만나기 어려우니까." 오씨가 말했다.

어쩌면 삭막하고 팍팍했을지도 모르는 1970년대, 화성 발안에서 3년여의 세월은 깊은 아쉬움을 남길 만큼 서로에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이문구는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들은 내가 그 동네를 떠나 서울로 이사한 지 13년째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끝내 동네 사람 명단에서 내 이름을 지우지 않고 있다. 내 생각에도 그곳은 여전히 '우리 동네'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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