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무겁게 짊어졌던 회문산은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됐을까. 회문산의 역사적 무게에 비해 문화예술적 성취는 전체적으로 크지 않다. 그럼에도 회문산을 무대 삼거나 소재로 한 문예창작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빨치산 활동을 기록한 이태의 수기 <남부군>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회문산을 조명하기 위한 지역 작가들의 문예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설 <남부군>의 주요 무대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가 저술한 수기 형식의 <남부군>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1988년 <남부군>이 발간됐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병주와 조정래가 각각 장편소설 <지리산> <태백산맥>을 통해 빨치산 문학의 길을 열었다면, <남부군>은 작가의 직접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은 저자가 빨치산에 입문한 회문산에서부터 지리산에서 체포될 때까지 기록이다. 서울에서 합동통신 기자로 활동하던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흡수돼 전주지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빨치산 입문 계기였다. 1950년 9월 연합군이 군산에 상륙하면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를 따라 그 대원이 되어 회문산으로 들어가게 됐다.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돼 17개월간 체험을 기록한 것이 바로 <남부군>이다.
저자와 빨치산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남부군>이 생생하게 전한다. "구림천 골짜기 거너너 저편에 봉리는 7백미터대의 장군 회문연봉, 그리고 어느 골짜기엔가 사령부가 있을 시퍼런 산덩이는 마치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믿음직하게 보였다. 섬진강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며 솟아 오른 회문봉의 나무 없는 정상은 옛 얘기에 나오는 고성처럼 장엄하고 신비로웠다. 거기서 말안장처럼 한 번 숙었다 다시 솟은 장군봉은 거대한 바윗덩이를 잇고 있어 ‘투구바위로 불렀다. 회문산괴를 이루는 이 두 봉우리는 이듬해 3월 사령부가 소백산맥으로 이동할 때까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의 메카였다.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도 아득히 그 봉우리들이 바라보이면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회문산 무대는 국군의 집중 진압작전에 따라 덕유산까지 1개월에 걸쳐 이동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체포될 때까지 과정을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태 본인의 빨치산 활동이 17개월에 불과하고 하급 간부로서 정보를 접하는 데 한계가 있어 일면만을 다루거나 잘못된 기술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남부군>은 이태의 풍부한 화술로 묘사된 개인사의 정리일 뿐 당시 빨치산의 집단적 삶과 의식을 객관화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곁들여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회문산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 작품으로, 회문산의 빨치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태는 1952년 생포된 후 사상 전향하였고, 이후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를 지냈으며, 회문산을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속 회문산

회문산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데는 영화 ‘남부군’이 큰 몫을 담당했다. 이태의 <남부군>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부군’은 1990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는 대체로 원작을 충실히 따랐으나 개봉 당시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금기시됐던 빨치산 소재라는 이유로 종북논란도 제기됐으나 이후 오히려 반공물 성격이 짙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변화된 사회환경을 수용하고 시대적 담론을 반영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빨치산의 치정관계를 다뤘던 영화 <피아골>(1955)마저도 고뇌하는 빨치산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친공영화로 매도됐던 걸 감안하면 큰 변화며,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태백산맥’이 나올 수 있었던 밑거름도 됐다. 이 영화로 정지영 감독이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안성기·최민수·최진실은 각 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여러 후일담을 남겼다. 제작기간이 3년으로, 원작자의 빨치산 활동 기간이었던 1년 7개월보다 길었고, 동원된 엑스트라가 연인원 3만명에 달했다. 주연이었던 안성기가 89년 한 해 꼬박 이 영화를 촬영하느라 그 해 출연 작품을 내지 못했으며, 극중 역할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27일간 머리를 감지 않았다고 한다. 최진실과 임창정(고교 1년)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했다.

영화 촬영지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지린산·포항 보경사 등 전국에 걸쳐 있다. 주인공 이태가 활약했던 회문산에서 촬영한 장면은 주요 전투 장면과 철수 장면이다. 또 회문산 입구 안정 마을 앞 치천에서 빨치산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 등이 촬영됐다. 아지트를 배경으로 한 빨치산 활동상은 고창 선운산 정상과 용문굴 일대에서 촬영됐고,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 500명이 목욕하는 장면 촬영지는 장수읍 덕산리에 있는 덕산계곡이었다. 구절초공원으로 가는 길인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능다리(만경대 다리)에서는 경찰과 전투 중 총상을 당한 이태를 박민자(최진실)가 치료해주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이곳은 영화 ‘타짜’와 드라마 ‘전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회문산 로케이션 촬영때 영화 제작진과 주요 배우 등 약 30~40여 명이 순창읍에 숙소를 정하고 1주일 정도 숙식을 했으며, 당시 지역에선 영화배우 이야기가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순창의 시인 김영

회문산부터 지리산까지 이태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함께 한 순창 출신의 김영 시인(1929~1995, 본명 김웅)은 <남부군>에 실명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영화 남부군에서 최민수가 그의 역할을 맡았다. 이태가 남원수용소에서 6개월만에 풀려난 것과 달리 김영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복역 중 폐결핵으로 12년 9개월만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을 만큼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순창농고를 졸업하면서 시집을 내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은 198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한 후 그 해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출간했다. 그는 또 자전 수기 <총과 백합꽃>(1988년) <빨치산 철창수첩>(1990년)에 이어 서간집 <두 하늘에 띄우는 그림>(1991년)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자신의 삶과 시대적 아픔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이에 앞서 <신동아>(1965년 12월호, 논픽션 우수작)에 게재된‘벽과 인간’을 통해서다.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쓴 ‘어느 전향자의 수기’라는 부제를 단 이 논픽션은 그가 어떻게 빨치산에 들어가게 됐으며 그 후 포로수용소와 형무소 생활이 어떠했는지 일기체 형식으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 기독교사회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원거리에서 코뮤니즘을 경험했으나 차츰 환멸을 느껴 오래 방랑과 고민 끝에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코뮤니즘을 청산하고 전향하게 됐다. 그가 빨치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연세대에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순창으로 내려왔을 때 열성 남로당원 친구와 ‘붉은 완장’을 찬 여친 영향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2년 감옥살이 후에 남은 것은 폐병과 심장병과 위궤양 뿐이나, 만신창이 몸으로 생존경쟁의 광장으로 나선다. 제로. 아무것도 없는 영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지금 아무런 이력서도 없고 증명서도 없다. 도민증도 없고 당원증도 없다 보호자도 없고 집도 없다. 어디로갈까. 쿼바디스. 이제야 나의 구원자는 내가 되리라. 목숨보다 소중한 자유의 선물을 헛되게 해선 안된다.”(1964년 12월19일자 일기)
<빨치산 철창수첩>에서 그의 역사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책 서문에서 “(빨치산) 비극의 역사가 그대로 망각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고 저술 배경을 설명했다. 또 책 발간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도 “묶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내는 것은 더없이 아프고 쓰린 일이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또다른 비극을 방지하는 일이자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장교철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순창이 낳은 천재로까지 일컬어졌던 김영 시인은 분단이 준 처절하게 함몰되고 희생된 시인이다”며, “김영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원용 kimwy@jj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