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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한국의 고택 구례 운조루 & 쌍산재]‘나눔의 정신’ 마음이 머물고…‘비밀의 정원’ 발길이 머무네

진짜 한국을 만나는 로컬 여행

 

한국 3대 명당에 지은 전통 양반집

나눔과 베풂 수대째 면면히 이어져

누마루에서 차 한잔의 여유 즐겨



◀타인능해 정신 이어온 ‘운조루’

마을의 안산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고, 풍토가 윤택해 ‘다섯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이름 붙여진 구례군 토지면의 오미(五美) 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3대 명당이기도 하다.
 

이곳 오미리에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된 고택 ‘운조루’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45년 전인 1776년(조선 영조 52년)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1726~1797)가 세운 아흔아홉 칸(현존 73칸)의 기와집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조선 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을 지닌 운조루(雲鳥樓)는 본래 사랑채 누마루(누각 형식의 높게 만든 마루)의 이름이었는데 문화재에 ‘운조루’로 등록돼 있어 고택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당호는 도연명(365~427)의 시 ‘귀거래사’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문 중앙에 각각 ‘龍’(용)·‘虎’(호랑이)를 쓴 한자가 붙어 있고 위쪽으로는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이 걸려 있다. 나쁜 기운을 물리쳐준다는 호랑이 머리뼈를 대문 양쪽에 걸어두었는데 그중 하나는 도둑맞아 말 머리뼈로 대신 걸어두었다.
 

대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마당을 뒤로 제법 대저택다운 한옥이 객을 맞이한다. 마당에는 투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간간이 투호 체험을 하는 이들도 보인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은 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의 형태를 갖추는데 운조루는 큰사랑채와 아랫사랑채, 안채(본채), 행랑채, 사당으로 나뉜다. 큰사랑채에는 바깥주인이 주로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세 방향이 트여 있어 여름거처로 쓰였다. 누마루는 누구나 들어와 차 한 잔 마시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해 두었다.

조심스레 안채를 둘러보고 있는데 외출에서 돌아온 류이주의 10대손 류정수(56) 씨가 방문객을 맞아준다. 형인 류홍수(1954~2017)가 운조루를 관리해오다가 돌아가신 후 셋째아들 류정수 씨가 9대 종부인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다. 지금은 문화재청의 안채 보수공사로 인해 지난해부터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행랑채는 일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본래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12칸씩이었는데 지금은 동쪽 11칸, 서쪽 7칸만 남아있다. 사랑채의 누마루나 일자형 행랑채는 궁전주택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운조루에는 ‘10대 정신’이 전해온다. 나눔과 베풂의 적선정신, 분수에 맞는 생활 정신, 풍류의 정신, 인간존중의 정신, 기록을 남기는 정신, 선정을 베푸는 정신, 건축을 사랑한 정신, 절개 지키는 선비정신, 부모 조상에 효도 정신, 겸애의 정신이다.

그 첫 번째가 나눔과 베풂이었다. 운조루를 대표하는 ‘타인능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생겼다. 운조루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행랑채에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목독(쌀독)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사람이 쌀을 빼다가 해결할 수 있게 했다. 쌀독 마개에 ‘他人能解(타인능해)’라고 써놓았는데 ‘누구나 마음대로 쌀독의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운조루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전통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정신과 그 정신을 후손들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실천에 옮겨온 때문이기도 하다.

쌀독은 최근 보존처리 후 ‘운조루 유물전시관’으로 옮겼다. 운조루에서 100여m 거리에 자리한 전시관에는 조선 후기부터 구례 오미동에 자리 잡고 살아온 문화 류씨가의 역사와 삶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누구나 편히 들어오게 소박한 대문

걸음마다 꽃·나무 가득 감탄 절로

‘윤스테이’ 촬영하며 전국 알려져


◀아름다운 전통정원 간직한 ‘쌍산재’

쌍산재는 장수마을로 유명한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상사마을에 있는 고택이다. 한옥 민박, 한옥 카페를 운영하며 쌍산재를 관리하고 있는 오경영 씨의 고조부 아호인 ‘쌍산(雙山)’에 집 재(齋)를 써서 ‘쌍산재’라 칭했다. 200여 년 전부터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아온 게 6대째 이어지고 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쌍산재는 조금 달라져 있다. 모습이 변했다기보다는 풍겨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사실 그 사이 쌍산재는 꽤나 유명해져 있었다. 지난해 1월 인기 예능 프로그램 tvN ‘윤스테이’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알려지면서 이전보다 더한 명소가 됐다.

외관은 여느 시골 한옥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쌍산재는 밖에서 봤을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습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쌍산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요. 딱 발길이 멈춘 곳만큼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곳이지요. 끝까지 들어가보지 않고는 쌍산재를 다 봤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주인장이 들려준 이야기처럼 쌍산재는 ‘비밀의 정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관리동, 오른쪽에 사랑채와 건너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맞은편에는 장독대와 옆으로 안채가 있고 사당으로 오르는 작은 돌계단이 보인다. 안채에서는 할머니, 어머니 등 여성들이 주로 생활했다. 춘궁기에 곡식을 채워두고 어려운 이웃에게 빌려주던 ‘나눔의 뒤주’도 있다.

쌍산재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장독대 왼편으로 난 죽로차 밭길은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곳이다. 죽로차 밭길 왼쪽으로 별채가 놓여있고 증조부의 아호를 따 지은 ‘호서정’까지 좁은 길이 이어진다. 호서정을 지나면 ‘비밀의 문’인 동백나무 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면 양쪽으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지고 파아란 하늘이 온전히 드러난다. 잔디밭으로 새고 싶은 발길을 붙들고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서당채로 향하는 ‘가정문(嘉貞門)’이 등장한다. 쌍산재에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서당채는 집안 아이들이 모여 글공부를 하던 곳이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제 아이가 이름자나 쓸 수 있게 가르쳐 주십사’ 보내곤 해서 자연스럽게 서당 분위기가 형성됐다.

서당채 옆은 경암당(絅菴堂)이다. 쌍산재 9채 한옥 중 하나인데 규모가 꽤 크다. 경암당과 서당채 사이에는 작은 연못 ‘청원당(淸遠塘)’이 있다. 연못 주위는 또 하나의 정원이다. 쌍산재에는 동백꽃, 대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석류나무, 도토리나무 외에도 치자꽃, 상사화, 작약, 산수유,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가득하다. 2018년 10월에는 전남도 민간정원 제5호로 지정됐다.

경암당 옆에 난 영벽문(暎碧門)을 열고 나가면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눈앞의 사도 저수지 주위로 산책길도 조성돼 있다.

 

 

 

쌍산재는 2004년 이후부터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해오고 있다. 과거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했던 선조들의 뜻을 받들고 싶은 마음이 크다. ‘나눔의 뒤주’나 집 앞 당몰샘에도 쌍산재의 나눔의 정신이 엿보인다. 고려 이전부터 있었다는 당몰샘은 당초 집 안에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편하게 물을 길어갈 수 있도록 밖으로 내고 담을 다시 둘렀다고 전해온다.

“고조부께서는 사람과의 인연, 관계가 늘 원만하게 좋아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집의 규모로 봤을 때 더 화려하고 크게 꾸밀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흉년으로 먹을 게 없으면 식량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는데 집이 너무 화려하고 크면 선뜻 발걸음을 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어려운 이웃들이 편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일부러 대문을 소박하게 지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나명주 기자 mjna@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