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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고도 경주의 근대산책] 103년 철도 역사 뒤안길 '경주역'

옛 철길 '선도산 기슭~형산강 철교'…구 경주역 現 서라벌문화회관 자리 위치
1918년 대구 왕복 경편 철도로 운영 시작…철로 좁고 탈선 사고 빈번
조선식 외관은 관광객 여정 자극 위한 연출…일제강점기 경주 제일의 번화가

 

2021년 12월 28일, 103년 역사를 지닌 경주역이 문을 닫았다. 지금 폐지된 역 건물에는 "영업 종료"를 알리는 현수막과 함께 "경주역 부지 임시활용을 위한 문화플랫폼 조성"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경주역은 철도역으로서 임무를 마쳤으나 재활용을 위한 모색이 시작되고 있다(사진1). 경주역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달갑지 않은 시선이 있는가 하면 많은 한국인에게는 수학여행이나 신혼·가족여행으로 경주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반겨주는 '현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산기슭에서 떨어지면 왼쪽에 서악(西岳)이 보인다. 그 밑에 고분군이나 무열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형산강(서천)의 철교(鐵橋)를 건너면 바로 고도역(古都驛)이다. 봉황의 알 모양의 서른 몇 개의 왕릉이 거대한 산이 되어 분지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소년기를 경주에서 지낸 소설가 장혁주(張赫宙)가 약 100년 전 기차를 타고 경주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풍경에 대한 묘사이다. 경주의 지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장혁주가 내린 경주역은 현 경주역과 위치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옛 철길은 서악(선도산) 기슭에서 바로 형산강(서천) 철교를 건너 경주에 들어왔다. 원래 경주역은 지금의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으며 역에서 내리면 북쪽에 봉황대를 비롯한 대형 고분군이 펼쳐져 있었다.

경주역이 생긴 것은 1918년이며 "103년 역사"라는 말은 이 '구 경주역'을 포함한 것이다. 작년에 폐지된 경주역은 1936년 12월에 이전·개업한 것으로 정확히는 "85년 역사"의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KTX 역과 재래선 역이 통합된 신경주역은 3대째 경주역이다. 엄밀히 말하면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던 경주역은 한 번 부수고 신축한 적이 있어 신경주역은 건물로서는 4대째가 된다.

초대 경주역의 개업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당시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따르면 1918년 9월 1일 대구와 왕복하는 경편철도(輕便鐵道) 역으로 운영이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불국사역도 개업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경주·불국사로 들어가려면 서악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대구에서 타는 경편철도는 마치 '장난감'처럼 초라한 차량이었으며 철로는 폭이 76.2cm로 협궤선 중에서도 가장 좁았다.

 

현재 표준적 철로 폭 1m 45.5cm의 약 절반이다. 당연히 속도를 낼 수 없어 대구에서 경주까지 4시간이나 걸렸다. 승객을 가장 괴롭힌 것은 '진동'이었다. 그 상황은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마차로 다니는 것보다 심했다"라고 어느 일본인이 술회할 정도로 탈선 사고도 빈번했다. (서악역에서 갈아타서) 경편 열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역에 도착했다. 많은 승객이 내렸다. 너무나 작은 역이라서 이상하게 느껴져 역장에게 물어봤더니 역시 그곳이 경주였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 서양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가 1920년에 경주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글이다.

초대 경주역은 이시이와 같은 첫 방문객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건물이었다. 당시 경주역 사진이 어디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필자가 아는 한, 경주역의 가장 오래된 사진은 1926년에 협궤선을 철로 폭이 넓은 광궤선으로 바꾸었을 때 신축된 2대 경주역 사진이다.

 

 

그 사진을 자세히 보면 기와를 이은 전통 양식으로 지붕에는 경복궁과 같은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상까지 얹혀져 있다. 이 신축된 2대 경주역에 대해서 소설가 장혁주는 "오래된 형식의 건물로 기둥이나 서까래가 단청으로 채색되어 있었다"라고 술회했다.

일제강점기 철도역은 경성역을 비롯하여 '문명국' 일본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서양건축 양식을 도입한 이미지가 강한데 왜 경주역은 잡상이나 단청까지 곁들인 전통 양식이었을까? 그것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의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철도국은 전통 도시의 철도역사에 관해서 조선식 건물 외관과 색조를 도입하도록 지시했다.

관광객의 여정(旅情)을 자극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이에 이런 역 건물은 경주뿐만 아니라 전주나 남원, 수원과 같은 전통 도시에도 지어졌다. 작년 말 경주역과 함께 폐지된 불국사역도 전통 양식으로 2대 경주역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

 

 

서라벌문화회관 바로 동쪽에는 최근 '황리단길'이라고 하는 '핫플레이스'가 형성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만약 지금도 경주역이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다면 승객 대부분은 '황리단길'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황리단길'에는 천마총 옆에 경주전기회사 발전소가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시설은 없었다. 당시 경주역에서 내린 승객은 역 앞에서 대기하는 인력거나 택시를 타고 경주 유적지를 유람하거나 도보로 북쪽 경주읍성 지구를 향했다.

935년 신라가 멸망하자 월성은 궁궐 기능을 상실했다. 경주는 고려왕조의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행정의 중심이 월성에서 동북 2km 정도 떨어진 경주읍성으로 이동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1012년(현종 3년)에 축성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행정의 중심이었다. 근대기에 일본인이 들어왔을 때도 경주읍성 지구는 경주의 중심기능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서울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중심지를 그대로 활용했다. 경주도 그 전형적 사례이다.

 

 

일제강점기 경주읍성 지구에는 군청, 경찰서, 법원, 병원, 학교와 같은 공공시설, 박물관이나 극장과 같은 문화 시설, 그리고 여관이나 식당, 골동품점, 잡화점과 같은 상업 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래서 경주역에서 내린 승객 중 많은 사람이 경주읍성 지구로 걸어서 올라갔다. 경주역이 있었던 서라벌문화회관과 경주읍성 지구를 잇는 현재 봉황로는 당시 '혼마치 도리(本町通)'라고 불렸으며 경주 제일의 번화가였다

일제강점기 관광객이 많이 다녔던 봉황로와 경주읍성 지구는 이제 공동화가 진행되어 뒤처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오랫동안 경주의 중심지였던 만큼 그 골목 골목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앞으로 '옛 핫플레이스' 봉황로를 거쳐 경주읍성 지구까지 천천히 걸어가면서 또 다른 경주를 같이 탐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