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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목숨과 맞바꾼 밥…지게에 총알·포탄 짊어지고 다부동 전투지 향한 8세 소년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의 '다부동 전투 지게부대' 참전기

 

고향가는 길목에 있는 칠곡을 지날 때면 옛 기억이 난다.

 

1950년. 그땐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저 엄마 손에 이끌려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막연한 곳으로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큰 형은 집안의 장남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몇 해를 공부했던 터라 상황의 급박함을 나보다 더 잘 알았으리라. 막내 여동생은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중이라 엄마가 더욱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 번 배고프다 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고 두세 번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었다. 그 마저도 지금에 와서는 후회가 된다. 엄마의 잘못도, 아버지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떼를 쓸 수 있는 다른 곳이 없었다.

 

그때 함께 피난 갔던 형님은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나도 어느새 80이 넘었다. 작년 이맘때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곳을 다시 가보았다. 전투가 있었던 골짜기들은 아무리 기억을 해내려 애써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전투병이 아니라 쌀밥을 얻어먹기 위해 총알을 나르던 여러 아이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또래보다 힘들지 않은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해마다 6월이면 내 삶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린 그 날이 더욱 뚜렷해진다. 산과 들의 모습, 공기의 냄새, 아침 밥 상 위에 나물까지. 북한의 침공 그 자체보다 더없이 평화로운 내 하루를 침범 당했다는 억울함이 훨씬 컸다.

 

이제 여덟 살인 아이에게 전쟁이라는 단어는 놀이의 연장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랬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래가진 못했다. 전쟁이 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피난길에 만나는 사람과 스쳐 지나는 모든 풍광은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중심에 자리 잡기 시작한 '배고픔'이라는 동무는 도무지 친해지지 않는 북한군보다 더 나쁜 '빨갱이'였다.

 

당시 라디오도 귀한 시골에서는 '카더라' 통신으로 전쟁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이 많았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밀고 내려왔다는 소식에 당시 안동경찰서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엄마에게 "인민군이 안동 근처까지 내려왔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라. 나는 여기를 떠날 수 없다"라고 서둘러 가족을 피난길로 떠밀었다. 아버지의 투철한 직업정신이었는지, 애국심의 발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엄마 혼자서 갓난쟁이 동생들을 업고 머리에 세간을 짊어지고 달구지 하나 없이 굽이굽이 산등성을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도 원망스럽다. 엄마 나이 서른도 되기 전이였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간 고향에서는 아버지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북한군에게 뒷산으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카더라는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다. 약간 상기된 모습과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와 우리들을 떠나 보내던 아버지 마지막 모습은 팔십 노인이 된 내 기억속에 애잔하게 남아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 본다. 너무 외롭거나 두려움에 떨지는 않으셨을까. 전쟁의 참혹함은 겪어 본 모든 이들의 일상 속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피난이 뭔지나 알았을까. 철없는 아이는 엄마에게 '배고파'를 달고 살았다. 그러면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구떡을 해주셨다. 모든 것이 귀한 시절, 특히 쌀 한 톨이 어려웠던 당시에 송구떡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내 항문은 그걸 부정하였다. 꽉 막힌 채로 일주일이 지나니 나는 살려달라고 또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 엄마는 양잿물로 만든 까만 비누를 갈아 먹였다. 이제는 설사가 일주일동안 이어졌다. 요즘 세상에는 듣도 보도 못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가난이 만들어 낸 떡 아닌 떡과 약 아닌 변비약은 알면서도 피할 수 없게 마법을 부렸다.

 

"야, 총알 날라주면 쌀밥 준데!"

 

귀가 솔깃해 졌다. 영천쯤 지날 때였다. 그 이야기의 배경이 1950년 8월 무더운 여름을 혹독하게 달구었던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지인 것은 삶아 남았기에 훗날 알게 됐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던 곳이었다. 인근의 주민들은 지게를 메고 고지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탄약과 식량을 날랐다. 같이 피난길에 오른 친구가 어디선가 얘기를 듣고 와서 함께 가자고 부추긴다. 아니, 내 조막만한 발걸음은 이미 쌀밥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총소리, 포소리, 탱크의 굉음은 충분히 나를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보다 허기를 채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만이 나를 지켜주는 갑옷이 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또래 네다섯 명이 탄약통을 끈에 묶어 짊어지고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못하게 막을 것을 알았기에 이리저리 둘러대고 다녔다. 아이가 들 수 있는 총알의 양은 적었지만, 길도 없는 계곡을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숙여 기다시피 오르다보면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제대로 된 신발이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미끄러지기가 수 십 번,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잡다보니 손에 상처는 많아지고 깊어졌다. 눈에 보이는 광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온전한 사람이 없었고 온전한 나무도 온전한 바위도 없었다. 다 깨지고 떨어지고 부서진 것들뿐이었다. 눈도 귀도 코도 모두 정상이 아이었다. 못 볼 것, 못 들을 것, 못 맡을 것들 천지였다. 그래도 그래도 견디어 냈다. 혼자였으면 못했겠지만, 친구들이 있어서, 먼저 이 길을 오르고 내리며 쌀밥 먹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친구가 있어서 고지를 오를 수 있었다.

 

내려온 길로 고봉밥이 선물처럼 손에 주어졌다. 눈 깜짝 할 새 없이 먹어치울 수 있지만, 엄마와 동생들이 하필이면 눈에 밟혔다. 큼지막한 나뭇잎 하나 따서 이건 엄마 꺼, 이건 동생 꺼를 나누니 배에서는 여전히 밥타령이 울렸다.

 

잠시 배가 채워지니 마음이 달라졌다. 내일은 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제 서야 무서움이 엄습해 온 것이었다. 사람마음이 참 가볍구나 하고 스스로 체감한 첫 날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음 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온 종일 지내다보니 쌀밥의 유혹은 다시 강해졌다. 한 번만 더, 그리고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총알을 받으러 향했다.

 

문득 며칠 전 보였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구 하나 없어진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진 않았지만 목숨과 밥을 맞바꿨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죽음을 슬퍼하고 고민하기에 나는 그냥 본능에 충실한 해맑은 아이일 뿐이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만드는 허기가 더 급했다. 배고픔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고 빗발치는 총알과 떨어지는 포탄 사이를 무섭게 지나가면 기다리고 있는 쌀밥이 너무나 맛있었다.

 

다음 날이면 또 총알 실은 지게를 지고 계곡을 오르기 위해 산으로 향하던 나같은 어린 아이들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저 산골짜기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말문이 막히고 눈시울이 젖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