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이 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대전 시민과 함께한 90일간의 여정을 마쳤다. 지난 3월 25일 막을 올린 특별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in 대전'은 지난 22일 폐막하며 대전 미술 전시 역사상 최다 관람 기록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전시 기간 동안 대전시립미술관은 물론 인근 한밭수목원까지 관람객들로 붐볐고, 반 고흐의 작품은 세대를 넘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예술과 일상, 미술관과 도시, 시민과 거장이 함께 만든 90일의 기록을 돌아본다.
◇국내 최초 지방 개최 반 고흐 단독 회고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in 대전'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방 공공미술관에서 열리는 반 고흐 단독 회고전이었다. 주관사인 서울센터뮤지엄과 대전시립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위해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과 수년간 협업을 이어왔고, 유화와 드로잉 총 76점을 국내로 옮기기 위한 보험, 운송, 환경 조성 등 철저한 기준을 충족해 전시를 성사시켰다.
전시작들의 보험 가액만 1조 원 이상에 달하며, 미술계에서도 보기 드문 대규모 회고전으로 평가받았다.
윤의향 대전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지역 미술관의 한계를 뛰어넘는 첫 도전이었다"며 "대전시민과 지역 예술계가 함께 만든 성과"라고 말했다.
◇24만 관람객 발길… 시민이 만든 기록
대전시립미술관은 3월 25일 개막 이후 90일간 휴관 없이 운영되며 총 24만 4227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이는 2014년 열린 '피카소와 천재 화가들展'이 113일간 기록한 15만여 명을 훌쩍 넘긴 수치로, 대전시립미술관 개관 이래 최다 관람 기록이다. 평일에도 가족 단위, 유치원·학교 단체 관람객이 이어졌고,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온 방문객들로 미술관 앞은 장사진을 이뤘다. 특히 N차 관람객과 연인, 중장년층 관람객의 비율도 고르게 나타나며 예술 전시에 대한 세대 간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관람객 분포도는 다양했다. 대전을 비롯해 세종, 충남·북도, 전북 등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과 부산 등 먼 거리에서도 관람을 위해 대전을 찾았다. 사전 예매 비율도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며, 전시에 대한 사전 인지도가 높았음을 보여줬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흥행을 넘어 지역 문화 인프라의 저력을 입증한 사례로도 남는다. 수도권 중심의 전시 문화를 넘어 지방 미술관도 충분한 콘텐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음을 증명했다.

◇고흐의 삶을 시기별로 조망한 몰입형 구성
이번 전시는 고흐의 생애와 화풍 변화를 시기별로 나눠 △네덜란드 시기(1881-1885) △파리 시기(1886-1888) △아를 시기(1888-1889) △생레미 시기(1889-1890)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로 입체적인 구성을 이뤘다.
'감자 먹는 사람들', '씨 뿌리는 사람', '자화상', '착한 사마리아인' 등 대표작들이 각 시기별로 배치돼 관람객은 고흐의 내면과 감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따라가듯 감상할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는 네덜란드 미술관 큐레이터 해설을 바탕으로 배우 지창욱의 목소리로 제공돼 몰입도를 높였고, 도슨트 프로그램은 평일 하루 두 차례 운영돼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배우와 자원해설사가 함께 만든 콘텐츠는 전시의 교육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높였다는 평가다.
◇대규모 전시 공간, 관람객 편의 확보
전시가 열린 대전시립미술관 제1-4전시실은 총 3168㎡ 규모로, 서울 전시 대비 2.6배 넓은 공간이다. 작품 간 간격을 넉넉히 두어 감상 몰입도를 높였고, 휴게 공간과 시야 간섭 없는 동선 설계가 호평받았다.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무장애 관람 환경도 눈길을 끌었다. 휠체어 및 전동 스쿠터 이용자도 불편 없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동선이 정비돼, 단체 방문객뿐만 아니라 장애인 단체의 호평도 이어졌다.
전시 관계자는 "작품 간 거리와 전시관 층고를 고려해, 관람객이 긴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 설계를 했다"며 "그림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가 이번 흥행의 또 다른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예술과 자연의 만남… 지역 관광도 '특수'
이번 전시는 도심 속 관광 콘텐츠와 자연스럽게 결합하며 시민들의 문화 향유 방식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난달 2-25일까지 한밭수목원에선 동원과 서원, 장미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봄꽃 축제가 진행됐다. 관람객들은 전시 감상 후 인근 잔디광장에서 돗자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거나, 수목원 장미길과 장독대정원을 거닐며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서 받은 여운을 자연 속에서 이어갔다.
또한 대전시티투어와의 연계도 지역 관광 활성화에 힘을 보탰다. 매주 토요일 운영된 시티투어는 '반 고흐전-중식-계족산 황톳길-한밭교육박물관-으능정이 거리'로 구성돼 전시 감상은 물론, 자연 체험과 식도락, 도심 역사문화 탐방까지 아우르는 복합형 관광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시티투어를 예약한 수도권 방문객들 사이에선 "미술관 하나 보러 왔다가 하루를 꽉 채우고 간다"는 반응도 나왔다.
반 고흐전은 단일 전시에 그치지 않고 대전을 '하루 문화도시'로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무사고·무훼손… 질서 있는 관람문화 빛났다
90일간 이어진 대규모 전시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작품 훼손이나 관람 중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대전시립미술관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인파를 수용하면서도 혼잡 없이 관람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동선 관리, 관람 인원 제한, 시간대별 분산 입장 등의 조치를 도입했다.
관람객들은 지정된 동선에 따라 이동하며,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을 준수하고 거리 간격을 유지하는 등 고흐의 작품 앞에서 자연스레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현장 운영을 맡은 학예팀과 전시 보안팀, 도슨트와 자원봉사자들도 매일 아침 개장 전 점검과 관람객 안내에 총력을 다했다.
윤의향 관장은 "이번 전시는 단지 관람객 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술을 통해 일상 속에서 공감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며 "이러한 전시가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데는 대전 시민의 높은 문화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전시립미술관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예술의 장이 더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