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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광복 80주년] "조선도 아일랜드처럼 독립할 수 있다"

성골롬반 선교회 3명의 신부들, 제주도민에 독립 의지 고취
일제의 패망 알리며 일장기 짓밟아...2~5년 동안 수형생활
도민들 핍박받고 수탈당하는 현실 분노하며 행동으로 저항
“시대의 징표에 응답한 선교사로서 몸소 희생정신 보여줘"

“배에서 내리지 말고, 한국으로 가라”

 

1933년 10월 아일랜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은 선교지인 중국 상하이 도착할 때 쯤 본부의 전보를 받았다. 선교사들을 태운 배는 방향타를 한국으로 돌렸다.

 

패트릭 도슨,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어거스틴 스위니 3명의 신부는 부산으로 입항한 후 1934년 제주에 왔다.

 

일제강점기, 제주도민들에게 일제의 패망과 독립의 희망을 심어준 가톨릭 신부들의 헌신이 광복 80주년을 뜻 깊게 하고 있다.

 

이들은 제주도민을 핍박하며 갖은 수탈을 벌이는 일제의 만행에 분노했다. 학생들에게는 일본어를 쓰지 말도록 했고, 행사 때마다 내걸린 일장기를 떼 내 발로 밟았다.

 

또한 강론과 교리시간마다 “조선은 죽지 않았다. 아일랜드처럼 독립할 수 있다”며 설교했고, 일본의 승전보는 거짓이라고 얘기했다.

 

1934년 천주교 중앙성당에 부임한 패트릭 신부는 “승전을 하고 있다는 일본 신문의 보도는 사실과 다르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 일제는 물자 부족으로 패전한다”고 했다.

 

서귀포성당과 서홍동 홍로성당에 각각 부임한 토마스, 어거스틴 신부는 “조선도 아일랜드처럼 독립할 수 있다”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들을 1941년 체포, 이듬해 유언비어 유포 혐의(육군·해군형법 위반죄)로 토마스·어거스틴 신부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패트릭 신부는 유언비어 유포에 천황 불경죄까지 더해 5년형이 선고됐다.

 

당시 제주에는 교도소(형무소)가 없어서 이들은 광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광복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서울 성북구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에서 만난 양창우 요셉 신부(부지부장)는 “선교사의 중요한 역할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응답하는 것으로, 이들은 제주도민들이 강제노동과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는 행동으로 일제에 항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견되면서 이들은 국제 정보와 소식에 밝았고,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제주도민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패트릭 신부는 수형생활 중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노역을 거부해 ‘똥지게’를 나르는 고역을 겪었다.

 

출소 후에는 양민이 학살당하는 제주4·3을 직접 겪었다. 그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군·경이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고 탄압 한다”며 이를 서방에 널리 알려 탄압을 멈추게 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패트릭 신부는 1970년대까지 한국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파견돼 1989년 선종했다.

 

토마스 신부는 “바람과 돌이 많은 제주도는 내 고향 아일랜드와 같다”며 제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1971년 영면하면서 황사평 성지에 안장됐다.

 

어거스틴 신부는 광복 후 호주로 파견됐고 1980년 뉴질랜드에서 영면했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1999년 광복절에 패트릭 신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토마스와 어거스틴 신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양 요셉 신부는 “법정에서 신자들은 신부님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끝까지 진술을 거부했다”며 “반면, 신부님들은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할까봐 ‘교우들은 잘못이 없으니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며 가톨릭 사제들의 희생 정신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