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는 건국직후 정국의 혼돈으로 성종 2년(983)에 가서야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후 고려 지방제는 10도제를 거쳐 5도 양계제로 정립되었다. 5도에는 5,6품의 하위직인 안렴사(안찰사)를 파견하여 군현을 규찰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제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도의 영역이 설정된 것으로 지방장관에 의해 일도가 통제되는 행정도제는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행정도제는 고려말에 탄생하였다. 1388년 창왕 즉위년 안렴사를 혁파하고 2품 이상의 대신급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신설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방제 개편은 위화도회군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성계세력은 1388년, 우왕 14년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6월에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세웠으며, 8월에 도관찰사제로 지방제를 개편하였다.
도관찰사로 개편에는 위화도회군세력이 지방통치의 문란을 바로 잡으면서 토지제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도관찰사 개편후 첫 관찰사들을 임용할 때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고 나온다. 공양왕 3년 과전법을 완성한 후, 이듬해 조선 개국을 몇 개월 앞두고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로 다시 돌아 간 것도 주목된다.
△첫 번째 전라도관찰사 최유경, 그 가문
고려말 관찰사제로 개편된후 첫 번째 전라도 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인물이 최유경(崔有慶)이다. 『고려사』에 1388년 8월 최유경을 전라도도관찰출척사로 임용하는 기사가 나오고, 전라감사 명부 『호남도선생안』(1875년 중수)에도 “도관찰출척사 최유경 무진 9월 하계(下界) 기사 10월 체(遞)”라고 수록되어 있다. 무진년은 1388년이고 기사년은 1389년이다. 8월에 임용되어 9월에 전라도 임지에 부임한 것이다.
최유경(1343~1413)은 전주최씨이다. 최씨는 이씨, 유씨와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성씨이다. 최유경 집안은 이미 전주를 떠났지만 그 뿌리를 전주에 두고 있다. 최유경은 조선초의 관찬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의 인물편에 실려 있지 않다.
『씨족원류』에 보면, 최유경은 최순작의 후예로 최재(崔宰)의 아들이다. 최재는 『고려사』 열전에 수록될 만큼 대단한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완산군에 봉해졌다. 최유경의 어머니는 군부정랑(軍簿正郞) 박윤류(朴允?)의 딸이다.
최유경에게는 사위(士威)ㆍ사의(士儀)ㆍ사규(士規)ㆍ사강(士康)ㆍ사용(士庸)ㆍ사흥(士興) 6아들이 있었다. 최사위는 한성부윤, 최사의는 판돈령부사, 최사규는 사헌부지평, 최사강은 좌찬성, 최사용은 첨지중추부사에 오르는 등 현달하였다. 최사흥은 현감을 지냈다고 하며 효자로 이름이 높아 최유경과 함께 진천군 문백면에 부자 효자문이 세워져 있다.
최유경의 자(字)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직으로 벼슬에 나왔으며, 1372년(공민왕 21) 판도좌랑에 임명되고, 이후 장령, 전법총랑 등을 지냈다. 양광도안렴사로 부임하여서는 불법적인 토지 점유를 바로잡고, 노비로 전락한 자들의 원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등 전민(田民) 변정(辨整)에 힘썼고, 공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최유경은 당대의 세도가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회군을 우왕에게 알리고도 개국원종공신에 책봉오늘날과 같은 행정도제는 고려말에 탄생하였다. 1388년 창왕 즉위년 안렴사를 혁파하고 2품 이상의 대신급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신설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방제 개편은 위화도회군 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성계세력은 1388년, 우왕 14년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6월에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세웠으며, 8월에 도관찰사제로 지방제를 개편하였다.
도관찰사로 개편에는 위화도회군세력이 지방통치의 문란을 바로 잡으면서 토지제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도관찰사 개편후 첫 관찰사들을 임용할 때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고 나온다. 공양왕 3년 과전법을 완성한 후, 이듬해 조선 개국을 몇 개월 앞두고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로 다시 돌아 간 것도 주목된다.
△첫 번째 전라도관찰사 최유경, 그 가문
고려말 관찰사제로 개편된후 첫 번째 전라도 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인물이 최유경(崔有慶)이다. 『고려사』에 1388년 8월 최유경을 전라도도관찰출척사로 임용하는 기사가 나오고, 전라감사 명부 『호남도선생안』(1875년 중수)에도 “도관찰출척사 최유경 무진 9월 하계(下界) 기사 10월 체(遞)”라고 수록되어 있다. 무진년은 1388년이고 기사년은 1389년이다. 8월에 임용되어 9월에 전라도 임지에 부임한 것이다.
최유경(1343~1413)은 전주최씨이다. 최씨는 이씨, 유씨와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성씨이다. 최유경 집안은 이미 전주를 떠났지만 그 뿌리를 전주에 두고 있다. 최유경은 조선초의 관찬사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의 인물편에 실려 있지 않다.
『씨족원류』에 보면, 최유경은 최순작의 후예로 최재(崔宰)의 아들이다. 최재는 『고려사』 열전에 수록될 만큼 대단한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완산군에 봉해졌다. 최유경의 어머니는 군부정랑(軍簿正郞) 박윤류(朴允?)의 딸이다.
최유경에게는 사위(士威)ㆍ사의(士儀)ㆍ사규(士規)ㆍ사강(士康)ㆍ사용(士庸)ㆍ사흥(士興) 6아들이 있었다. 최사위는 한성부윤, 최사의는 판돈령부사, 최사규는 사헌부지평, 최사강은 좌찬성, 최사용은 첨지중추부사에 오르는 등 현달하였다. 최사흥은 현감을 지냈다고 하며 효자로 이름이 높아 최유경과 함께 진천군 문백면에 부자 효자문이 세워져 있다.
최유경의 자(字)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직으로 벼슬에 나왔으며, 1372년(공민왕 21) 판도좌랑에 임명되고, 이후 장령, 전법총랑 등을 지냈다. 양광도안렴사로 부임하여서는 불법적인 토지 점유를 바로잡고, 노비로 전락한 자들의 원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등 전민(田民) 변정(辨整)에 힘썼고, 공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왜구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최유경은 당대의 세도가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유경의 이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위화도회군 때의 행적이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 때 그는 서북면 전운사 겸 찰방(西北面轉運使兼察訪)으로 있었다. 그는 이성계 세력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그 사실을 곧바로 우왕에게 달려가 알렸다. 『태조실록』 그의 졸기에 “오로지 최유경은 말을 달리어 성주(成州)에 이르러 위주(僞主,우왕)를 뵙고 변란을 고하고 수종(隨從)하여 서울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는 회군에 반하였음에도 2개월 후 전라도 관찰사로 임용되었다. 도관찰사는 회군후 지역을 장악하고 토지제 개혁을 해나가야 하는 자리였다. 그가 이성계세력과 연계되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최유경은 전라도관찰사를 마치고 동지밀직사사에 임용되었으며, 조선개국후에는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는 위화도회군 때 우왕 측에 있었으나 이후 회군세력과 같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데 된 데에는 태조 이성계의 총애가 작용하였던 것 같다. 최유경은 회군사실을 고변한 일로 역성혁명 세력에게 두고두고 견제되고 배척되었다. 회군 때의 일로, 개국원종공신 책봉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태조가 그 충의를 칭찬하고 반대를 물리쳤다. 태조는 회군 때의 일을 임금을 위한 것이라 하고, 그가 포치(布置)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포치란 사람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다.
최유경이 태조의 총애를 받은 데에는 신덕왕후 강씨와의 관계도 있지 않은가 한다. 그는 태종대에 벼슬에서 물러나는데, 『태종실록』에 보면 태종이 대언(승지) 김여지에게 “옛날 재신 최유경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제릉(齊陵)은 제사할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간인(奸人)의 꾀임에 빠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릉은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능이다. 최유경은 강씨부인 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졸기에 태조에게 정릉만 후하게 한다고 아뢰었다는 기사도 있다. 그러나 태종이 그런 말을 하고, 태종대에 최유경이 파직되고 낙향한 것은 곧 그가 강씨쪽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전주부성 축성 여부와 숭례문 축조
최유경의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재임시 주목되는 것은 전주부성 수축여부이다. 1734년 전주부성을 새로 쌓은 관찰사 조현명이 「풍남문기」에서 전주부성이 위화도 회군 때 축성되었으며 이 일을 관찰사 최유경이 주관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1767년 대화재로 민가 일천여호와 남문과 서문이 불타서 관찰사 홍낙인이 남문과 서문을 새로 짓고 각각 풍남문, 패서문이라 이름하고는, 「패서문기」에서 전주부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조현명의 말과 홍낙인의 말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사』에 보면 우왕 때 전주성이 왜구에 점령되고 불탔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즉 최유경 이전에 이미 전주성은 있었다. 따라서 최유경이 전주성을 새로 쌓은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주성을 보수 내지 고쳤거나, 아니면 최유경이 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고 숭례문을 건립하는 책임자로 역할을 했음으로 전주성을 처음 쌓았다고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 토목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태조 5년 기사에 “성문 제조(城門提調) 최유경”이라고 나온다. 당시는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이다. 1962년 숭례문(남대문)을 해체 복원하면서 상량묵서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1396년, 태조 5년 10월 6일 판사 가정대부 중추원사 최유경 부판사 전가선대부 개성부윤 이지호 …(洪武 二十九年 丙子 十月初六日 判事 嘉靖大夫 中樞院使 崔有慶 副判事 前嘉善大夫 開城府尹 李之浩 …)” 라고 쓰여 있다. 최유경은 숭례문을 축조한 책임자였다.
△조선건국 후 관직과 사신의 평
최유경은 조선건국후 태조대에 경상도도관찰출척사, 중추원사, 경기ㆍ충청도 도체찰사, 경기도 우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냈다. 태종대에 참찬의정부사에 올랐으며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다. 태종 3년 사헌부의 수장인 종2품 대사헌에 올랐다가 이듬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바로 판한성부사에 임용되었고, 태종 6년 참찬의정부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죽정마을로 낙향하여 호를 죽정이라고 하고 말년을 보내다가 71세로 운명하였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하였으니, 기개가 있어서 용감히 말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는 것을 이름이다. 두루 중외에 이름을 드날려서 사람들이 청렴 정직하다고 칭찬하였다.”라고 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최사의도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으며, 충북 청주시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최유경의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재임시 주목되는 것은 전주부성 수축여부이다. 1734년 전주부성을 새로 쌓은 관찰사 조현명이 「풍남문기」에서 전주부성이 위화도 회군 때 축성되었으며 이 일을 관찰사 최유경이 주관하였다고 한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1767년 대화재로 민가 일천여호와 남문과 서문이 불타서 관찰사 홍낙인이 남문과 서문을 새로 짓고 각각 풍남문, 패서문이라 이름하고는, 「패서문기」에서 전주부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조현명의 말과 홍낙인의 말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고려사』에 보면 우왕 때 전주성이 왜구에 점령되고 불탔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즉 최유경 이전에 이미 전주성은 있었다. 따라서 최유경이 전주성을 새로 쌓은 것은 아니다. 기존의 전주성을 보수 내지 고쳤거나, 아니면 최유경이 후에 한양도성을 축성하고 숭례문을 건립하는 책임자로 역할을 했음으로 전주성을 처음 쌓았다고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 토목에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태조 5년 기사에 “성문 제조(城門提調) 최유경”이라고 나온다. 당시는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이다. 1962년 숭례문(남대문)을 해체 복원하면서 상량묵서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1396년, 태조 5년 10월 6일 판사 가정대부 중추원사 최유경 부판사 전가선대부 개성부윤 이지호 …(洪武 二十九年 丙子 十月初六日 判事 嘉靖大夫 中樞院使 崔有慶 副判事 前嘉善大夫 開城府尹 李之浩 …)” 라고 쓰여 있다. 최유경은 숭례문을 축조한 책임자였다.
△조선건국 후 관직과 사신의 평
최유경은 조선건국후 태조대에 경상도도관찰출척사, 중추원사, 경기ㆍ충청도 도체찰사, 경기도 우도 도관찰출척사를 지냈다. 태종대에 참찬의정부사에 올랐으며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다녀왔다. 태종 3년 사헌부의 수장인 종2품 대사헌에 올랐다가 이듬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바로 판한성부사에 임용되었고, 태종 6년 참찬의정부사를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충북 진천군 초평면 죽정마을로 낙향하여 호를 죽정이라고 하고 말년을 보내다가 71세로 운명하였다.
『태종실록』, 그의 졸기에 “시호를 평도(平度)라고 하였으니, 기개가 있어서 용감히 말하고 남에게 굽히거나 아첨함이 없는 것을 이름이다. 두루 중외에 이름을 드날려서 사람들이 청렴 정직하다고 칭찬하였다.”라고 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그의 아들 최사의도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있으며, 충북 청주시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