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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중화루 '1922년 신장개업' 전화 2대 배달영업… 동흥루·공화춘 능가

 

 

인천차이나타운의 최대 중화요리점으로서 50여 년 동안 자리한 '중화루'(옛 대불호텔 건물)의 위상을 새로이 밝힌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인천 중화요리 역사가 짜장면박물관으로 널리 알려진 옛 '공화춘' 중심으로 전개된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인천시립박물관이 6일 발간한 소장유물 자료집 '중화루의 얼굴-간판'에 수록된 인천대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의 논고 '근·현대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 속의 중화루'는 기존 알려진 중화루의 역사를 수정하거나 새로 발굴했다.

인천시립박물관 발간 소장자료집
이정희 교수 논고서 '수정·발굴'

 


1883년 인천 개항장에서 영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문 닫은 이후 대불호텔의 벽돌조 3층 건물에는 중화루가 들어섰다. 이정희 교수는 '인천부사'(1933) 언급을 토대로 1918년으로 알려진 중화루 개업 시기가 실제로는 3년 빠른 1915년임을 '인천화상상회'(현 인천화교협회)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합자회사로 운영하던 중화루의 경영자는 1922년 일본인 대불호텔 소유주로부터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고 그해 음력 2월 '신장개업'했다. 이번 인천시립박물관 자료집에서 다룬 유물인 '중화루 간판' 제작 시기도 1922년 음력 2월로, 당시 번성한 중화루를 상징한다.

중화루는 한국 중화요리 발상지인 인천의 최대 중화요리점이었다.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를 보면 당시 인천에서 규모가 큰 중화요리점은 8곳으로, 영업세 과세표준액 기준 중화루가 3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동흥루가 2만원, 공동춘 9천원, 의생성 5천원 순이었고, 그 외 4개 요리점(공화춘 포함 추정)은 2천~3천원이었다.

1920년대 중화루가 전화기 2대를 두고 '배달 영업'까지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화루는 1926년 12월자 조선신문 등 여러 신문에 전화번호를 기록한 광고를 내기도 했다. 같은 시기 공화춘과 동흥루는 전화기를 한 대만 뒀다. 1942년 주경성중화민국총영사관 자료를 보면 중화루 종업원은 27명, 송죽루(옛 동흥루) 23명, 공화춘 16명이었다.

"영업세 1위… 최대 중화요리점"
1970년대말 폐업·간판 등 남아


중화루는 해방 이후에도 성업을 이뤘다. 1949년 인천에는 화교가 경영한 중화요리점과 음식점이 69곳에 달했다. 한국전쟁 중 잠시 문을 닫기도 했지만 1950년대에도 장사가 잘 됐다. 1960년대 말 한국인의 '중국집' 개업이 늘어나고, 한국화교의 미국 이민 증가, 정부의 화교 중화요리점 영업 제한 조치 등이 이어졌다.

1970년대 말 화교가 경영하는 중화요리점은 전국에서 30% 정도만 남았고, 중화루도 이 시기 폐업했다. 다행히 1978년 중화루 건물이 철거되기 전 중화루 간판을 포함한 유물 8점을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게 됐다.

이정희 교수는 "근대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화요리점 동흥루(송죽루), 공화춘, 중화루 가운데 중화루는 자본금 규모와 종업원 수, 판매액 등에서 나머지 두 요리점을 능가했다"며 "공화춘 중심으로 인천 중화요리점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3면(인천시립박물관 '중화루의 얼굴-간판' 발간)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