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마을 언덕 꼭대기 향하는 골목골목
세월의 희로애락 고스란히 담은 벽화들
이방인들 마치 시간여행자 된 듯한 착각
도째비골엔 59m 높이 투명 전망대 아찔
한 달 전 대형산불 생채기 아직 남았지만
희망의 꽃망울 터트린 묵호로 초대합니다
흑백사진 위로 서서히 색채가 번져 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화마에 온 색깔을 빼앗겨 웅크린 검은 산등성이 위로 분홍빛 생명이 피어난다. 움트는 꽃과 여린 잎 위로는 따뜻한 봄비가 상처를 어루만지듯 내린다. 고요히 분주한 풍광 속에서 어부들을 태운 배는 만선의 꿈을 안고 유유히 떠나고, 식당은 문을 열어 손님을 맞고, 카페는 음악과 커피향을 풍긴다.
올 3월4일부터 동해에서만 2,100㏊를 불태운 대형산불은 주민들을 또다시 시련으로 몰아넣었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멈추지 않는 생명력과 회복의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석탄산업의 쇠퇴와 어획량 감소로 생기를 잃었던 묵호를 관광지로 탈바꿈시키고, 사람이 몰려드는 매력적인 마을로 만든 그 주민들이 아직 여기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물새가 새까맣게 몰려든다 해서 ‘먹 묵(墨)' 자를 붙여 지어진 이름, 묵호. 꼭대기에 자리 잡은 ‘논골담길'은 그런 묵호의 역사와 치열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마을이다. 위태로운 비탈과 좁고 복잡하게 꼬인 길 탓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지만, 세월의 희로애락을 담은 벽화들에 자꾸만 발걸음이 붙잡힌다. 바닷가 짠내음이 덕장에서 오징어와 명태가 말라 가는 냄새로, 아련한 파도 소리가 마을주민들의 웃음소리로 느껴지는 경험. 그 시절 삶이 성큼 다가오는 골목에서 이방인들은 저마다 시간여행자가 된다.
마음 가는 대로 골목골목을 누비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모든 길은 언덕 위 우뚝 솟은 묵호등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 자리 잡아 주민들과 먼바다 어선들이 보이고, 발 아래로는 동해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묵호등대 광장에서 곧장 통하는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역시 둘러볼 만하다. 묵호등대와 월소택지 사이 골짜기에 전망시설과 각종 체험시설을 조성한 관광지다. 비 내리는 어두운 밤이면 도깨비불 같은 푸른빛이 발견된다 하여 ‘도째비(도깨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59m 높이 투명 바닥 전망대, 하늘 위 자전거, 자이언트슬라이드 등 체험을 즐기다 보면 오싹한 아찔함이 밀려온다.
도째비골에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가지각색 맛집들은 묵호의 정체성을 완성시켜주는 마침표다. 동해에 가면 꼭 맛봐야 할 곰칫국은 취향에 따라 김치를 넣은 빨간 국물로, 시원한 하얀 국물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그날 잡은 횟감을 바로 썰어 넣은 신선한 물회, 회덮밥도 빠질 수 없는 메뉴. 들어간 고기가 무엇인지 묻는 것은 실례다. 날마다, 시간마다 들어가는 어종이 천차만별이라 사장님도 모른다고.
검게 그을린 산 위로 분홍색 꽃망울이 희망을 틔우는 이 봄, 묵호에는 좌절이 아닌 생명력이 넘실댄다.
누구도 쉬이 찾지 않던 ‘잿빛바다' 묵호가 유연탄을 실어 내보내는 항구로, 오징어·명태 어업전진기지로, 동해의 대표 관광지로 꿋꿋이 살아남아 색을 입혀 간 것처럼, 화마의 생채기를 입은 산 위로도 느리지만 빼곡하게 다채로운 녹빛이 채워질 것이다. 살갗 위로 내려앉는 햇살이 다정한 계절, 동해 묵호를 찾아 이 치유의 과정에 응원을 더해보는 건 어떨까.
동해=김현아·박서화·이현정기자 / 편집=이상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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