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강릉 23.8℃
  • 맑음서울 22.4℃
  • 맑음인천 21.2℃
  • 맑음원주 22.5℃
  • 맑음수원 22.2℃
  • 맑음청주 23.1℃
  • 맑음대전 23.5℃
  • 맑음포항 25.5℃
  • 맑음대구 24.2℃
  • 맑음전주 24.6℃
  • 맑음울산 25.1℃
  • 구름조금창원 24.7℃
  • 맑음광주 23.1℃
  • 맑음부산 24.8℃
  • 맑음순천 23.8℃
  • 맑음홍성(예) 22.2℃
  • 맑음제주 21.2℃
  • 맑음김해시 24.3℃
  • 맑음구미 25.1℃
기상청 제공
메뉴

(매일신문) 고도 경주의 근대산책

"류(주인공)는 간혹 종각에 들어가서 신종에 상처를 입힌 적이 있다. 비천상 주변에 있는 홈을 돌도끼로 새겨 금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떨어진 금가루를 보고 금이 나왔다고 하면서 장난쳤다. 류는 신종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해져 안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땅에 기어서 들어갔더니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곰팡이 냄새로 숨이 막혔다. 무서워서 서둘러 신종 밑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겨우 머리만 밖으로 나왔을 순간 만약 종이 떨어져서 몸이 토막 나지 않을까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류는 무사히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그 후 신종에 장난치러 가지 않게 되었다."

 

 

 

이 글은 소년기를 경주에서 지낸 소설가 장혁주(張赫宙, 1905-1997)가 일본어로 쓴 자서전적 소 설 『폭풍의 시』(1975년, 원제 『嵐の詩』)에 나온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회고담이다. 한일병합을 전후한 시기의 일화인 듯한데,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신종은 당시 봉황대 앞 현 봉황로 길가에 있었다.

771년 어렵게 완성된 신종은 북천 강가에 창건된 봉덕사에 봉안되었다가 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졌고, 1507년에 다시 봉황대 앞으로 옮겨졌다. 봉황대 앞에 있었을 때 신종은 불교적 맥락을 떠나서 경주읍성 앞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군대를 징집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병합 후 신종은 또 한번 옮겨지게 되었는데, 장혁주는 같은 소설에서 그때 정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드디어 종이 해체한 종각에서 그 모습을 나타냈다. 많은 인부가 손에 통나무를 들고 종 주위에 운집했다. 구경꾼은 봉황대 밑에서 시가지로 넘쳐 있었다. 류는 인부들 사이를 누비며 종 가까운 데까지 다가갔다. '비켜라!' 흰색의 린네르의 여름용 제복을 입은 순사가 와서 매를 휘둘렀다. 종이 향하는 통로에는 통나무가 철도의 침목처럼 깔려 있었다. 그 위를 종이 지나갔다. 종은 완만한 내리막길을 비교적 간단히 내려왔으나 평탄한 도로에 와서는 전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인부가 땀투성이가 되어 외치는 소리는 헛되이 종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1개월 정도 지나 종은 보존회 옆에 도달했다."

 

이 신종 이전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이 사진 속에 보이는 흰옷을 입은 조선인 인부나 구경꾼, 밑에 깔린 통나무, 그리고 거만하게 지켜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장혁주의 묘사 그대로이다.

이 글에서 나온 "보존회"는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을 가리킨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주도하여 1913년 5월에 설립된 일본인 중심의 관변단체였으며 설립을 위한 실무는 경주군 서기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 1898-1927)가 맡았다. 보존회 진열관은 1915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어 경주 각지에서 수습된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6년에는 공식 박물관인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국 정부로 인계되어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발하여 1975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 위치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종은 핵심 전시물로 지목되어 진열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봉황대에서 북쪽 1km 정도 떨어진 현 경주문화원 자리에 있었다. 장혁주의 글에 따르면 신종을 옮기는 데 1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18.9t이나 되는 신종의 무게와 당시 기술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문제는 정확한 이전 시기이다. 시기에 관해서는 1915년 설과 1916년 봄 설이 있는데, 1915년 설도 8월 설과 10월 설로 나뉘어 있다. 장혁주의 글에서는 그것이 여름철의 풍경으로 묘사되었으나 사진에 보이는 일본인의 양복 차림에다 중절모자까지 쓴 모습을 보면 과연 여름철에 일어난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국어학자 이중화(李重華, 1881-?)는 그 저서 『경주기행』에서 "1916년 5월 10일에 종각을 옮겼다"라고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식 문서가 아니어서 지금까지 결정적인 증거로 간주되지 않았다.

과연 신종은 언제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으로 옮겨졌을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인터넷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916년 4월 30일에 총독부 기사 이지마 겐노스케(飯島源之助)가 작성한 문서 '봉덕사 범종 운반용 로프(rope) 구입 건'에 "4월 23일부터 (신종의) 운반에 착수"라고 하는 구절이 보인다.

 

 

이것은 신종 이전을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신종 이전을 시작한 시일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한편 신종 이전이 완료된 날짜를 기록한 문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신종과 함께 옮겨져 지금도 경주문화원 자리에 남아 있는 종각을 2009년 4월에 보수하다가 들보에서 발견된 3장의 상량문 중 일제강점기 종각이 옮겨졌을 때 지어진 상량문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다이쇼 5년(1916) 5월 12일 상량"이라고 적혀 있다. 이 날짜는 이중화가 기록한 "5월 10일 이전"과 거의 일치한다. 이에 신종은 종각과 함께 1916년 4월 23일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5월 10일에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에 도달했고 이틀 뒤에 상량식을 올린 것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신종을 이전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장혁주가 기술한 1개월보다 열흘 정도 짧은 20일 정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종 이전이 인해전술로 힘들게 이루어진 작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불교 신앙의 대상이었던 신종은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맥락에서 행정·군사적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로부터는 박물관 전시물로 관람객들이 감상하는 미술품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 중의 국보인 성덕대왕신종에 관해서는 말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앞으로 천천히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아라키 준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