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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58년생 김영수-베이비부머 이야기·(1)그들이 걸어온 길]'82년생 지영이 아빠' 당신의 이름은

 

'한강의 기적' 산업화 주인공 5060 부모세대
찬란했던 과거 지나고 '냉혹한 노후' 맞기도
급변하는 세상속 '영수' '영숙'의 삶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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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베이비부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나 '한강의 기적'을 이끈 산업화 주역이자,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50·60 세대를 일컫는다.

산아 제한 정책 도입기를 기준으로 이 시기의 출생자와 1968~1974년 출생자를 전·후기 또는 1·2차 베이비부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올해는 베이비부머의 맏이인 1955년생이 만 65세, 법정 노인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베이비붐 세대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끈 산업 현장의 역군이면서 군부독재에 맞서 싸워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운 주인공이다. 오로지 가족과 국가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기꺼이 청춘을 바쳤다.

그렇게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이들은 지나간 세월의 무게만큼 이제는 몸도 마음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찬란했던 과거의 자부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초라하고 냉혹한 노후의 삶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공기업에서 정년퇴직한 60대 경비원의 이야기 등을 다룬 어느 책 제목에 쓰인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란 단어는 은퇴 이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급 노동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이들의 팍팍한 삶을 대변한다.

4차 산업혁명이 만들어 내는 일상의 빠른 변화는 기성세대들의 고립감을 더하고 있다. 키오스크 주문을 하지 못해 햄버거 하나도 마음 편히 사 먹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자화상이다.

경인일보는 베이비붐 세대를 상징하는 '58년 개띠' 출생자 중 가장 흔한 남성 이름인 '영수'(여성 이름은 영숙)를 이번 기획의 제목으로 달았다.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남성 이름인 영수로 정했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부모 세대인 '58년생 김영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58년생 김영수-베이비부머 이야기]'58년생 김영수'중에 한 명 김원일

경제발전·민주화 관통한 '세가지 삶'… 쉽지 않았던 가장의 선택

 

 

퇴직금 더 까먹기 전에 '카페 운영' 결심
자리잡나 했더니 결국 매출 줄면서 접어
어렵게 택한 경비원 '갑질' 피해 당하기도
옮긴 직장에선 저축도 하면서 보람 느껴
직업 고민하는 또래에게 "힘내라" 응원

1·4후퇴때 수원에 온 부모 밑에서 자라
어릴적 꿈 '음대' 접고 은행원으로 첫발
국가 힘들때 대출심사 등 역할 자부심 커
6월 항쟁땐 '넥타이 부대'로 활약하기도
IMF위기 10년 버티다 '퇴직' 눈앞이 캄캄

저는 베이비붐(1955~1963년생) 세대의 대명사로 불리는 '58년생 개띠' 김원일입니다. 앞서 보셨을 3장의 사진은 이름만 같을 뿐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이 담긴 저의 '인생 앨범'일 수도 있겠네요.

빛바랜 사진은 남부럽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은행원', 가운데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사진은 은퇴 이후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커피숍 사장',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가게를 접고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의 저 김원일입니다.

 

 

# 월남한 부모님 밑에서 58년 개띠로 태어나다

1958년 2월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해에 제 동갑내기가 100만명 가까이 출생했다죠? '1·4 후퇴' 당시 고향인 황해도에서 수원으로 월남하고 수원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 음대에 가고 싶었는데 은행원이 됐어요. 돌아가신 둘째 형님의 장래 희망을 대신 이룬 건데 중학교 때 매까지 맞아가며 주산 1단 자격증을 땄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로 유학을 다녔어요. 그때만 해도 수원에서 통학하는 데 3시간이나 걸렸던 서울 동대문상고(현 청원여고)를 나왔습니다.

그렇게 1981년 9월 반듯한 정장을 입고 국내 4대 은행으로 꼽히던 한 곳의 신입 행원이 됐습니다. 사실 운이 좋았죠. 지금과 다르게 경제가 좋을 때여서 대졸 말고 고졸만 140명 정도를 뽑았으니까요.

 

 

# 가족·나라 모두 살린 은행원의 자부심

어릴 적 꿈인 음대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은행원이 된 덕분에 가족을 살렸어요. 둘째 형님 사업이 1979년 석유 파동으로 휘청였는데 직원 혜택으로 은행에서 저금리 대출을 받아 집안의 큰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했죠.

갖고 있던 주택 2채를 팔고 인천 부평으로 이사했는데 대출을 받아서 원래 살던 수원에서 집을 다시 장만할 수 있었어요. 복지 수준은 물론 사회적 지위도 꽤 높았습니다. 정부는 제가 다닌 은행의 적지 않은 지분을 갖고 있었고 국내 4대 은행이다 보니 규모도 컸어요.

당시 유명했던 한보철강 같은 대기업 말고도 기술력은 있는데 자금이 없었던 중소기업도 대출을 받으려 줄을 섰었으니까요. 마침 제가 대출 심사와 신용 평가 업무를 맡았을 때라서 우리가 빌려 준 자금으로 기업이 성장하고 국가 경제가 발전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정말 컸습니다. 그때 아마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10%가 넘었었죠?

 

 

# 6월 민주화 항쟁의 현장에서

저는 1986년 서울 무교동 청계천 근처 영업지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때 대학생들이 매일같이 서울시청, 광화문, 청와대에서 민주화 시위를 했었죠. 이듬해인 1987년 4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씨가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시위가 더욱 격해졌습니다.

하루는 최루탄을 맞은 학생 한 명이 우리 은행 건물로 들어와 몸을 숨긴 적도 있어요. 그해 6월 초, 전국으로 시위가 번졌고 우리 은행 직원들도 틈만 나면 거리로 나갔습니다.

'넥타이 부대'라고 들어보셨죠? 영업시간에는 사무실을 지키다가 점심때나 쉬는 시간이면 밖에 나가서 청계천부터 청와대까지 학생들과 같이 목이 찢어져라 외쳤죠.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약속한 6·29 선언이 나오게 됐어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전 국민이 직접 대통령 뽑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내게도 1997년 외환위기 구조조정의 칼날이

그 시절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맞았을 때보다 더 힘든 시기가 있었죠. 외환 위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1997년이었습니다.

그해 은행에서 퇴사 압박이 있었는데 형님한테 "퇴직금을 준다는데 어쩌죠"하고 물었다가 된통 혼났습니다. "한참 키워야 할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지금 일을 관두면 뭘 할 거냐"고 몇 시간 동안 야단을 맞았어요.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1999년 대전 영업본부에서 근무할 때도 "그만두라"는 언질을 받았어요.

그 뒤로 수원에서 2시간 넘게 걸리는 서울시 성북구에 발령이 났을 때도. 그다음엔 멀지 않은 화성시 쪽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기피부서로 인사를 내더라고요. 나가라는 거였죠. 그렇게 10여년을 버티다가 2009년 2월 일을 관뒀습니다.

어느새 부쩍 자란 두 아들의 대학 등록금만 해결할 수 있으면 되겠다 싶었어요. 은행에서 퇴직금에 자녀 학비까지 얹어서 준다더라고요.
 

 

# 오갈 데 없이 막막했던 퇴직 이후 삶

퇴직금 수억원을 손에 쥐었는데도 청춘을 바친 직장을 잃고 우두커니 집에 앉아 있으니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노후 대비 같은 건 퇴직 전까지 생각도 못 했죠. 그렇게 1년 반을 집에만 있었습니다.

왜 아무것도 안 했느냐고요? "함부로 치킨집 같은 거 차렸다가 망하는 거 순식간"이란 말을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거든요. 겁도 많이 났었죠. 시청 일자리센터나 고용복지센터도 물론 가봤습니다. 은행원 경력을 살릴 만한 일자리는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거나 월급이 100만원도 채 안 되는 거였어요.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인데 월급 100만원 짜리 일자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죠. 그런데 야속하게도 매달 생활비는 500만~600만원씩 빠져나가더라고요. 1년 반이 지나고 나니 퇴직금 중 1억원이 사라졌습니다. 이젠 정말 '뭐라도 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 '자영업', 만만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로 대학교나 병원 안에서만 영업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차릴 수 있었어요. 길거리의 개인 카페는 매출이 안 나올까 봐 불안했고 유명 프랜차이즈는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 꿈도 못 꿨는데 운이 좋았죠. 안산의 한 대학에서 2011년 가게를 열고 2년 정도까진 괜찮았어요.

인건비가 높아서 직원 없이 아내와 둘이서만 카페를 운영했죠. 학생들이 가족처럼 우리를 맞아줬고 카페 말고 매점도 같이 운영해 매출도 높았어요. 고생한 끝에 자리를 잡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대 계약상 갑인 학교 측이 인테리어 등에 투자하라는 거예요. 1억원이 넘는 공사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카페 운영 업체를 들이겠다는 거 아닙니까.

다행히 저희 카페 본사의 중개로 수원의 한 대학에서 영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곳은 학생 수가 워낙 적다 보니까 매출이 나오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카페 운영도 2018년을 끝으로 접었습니다.
 

 

# 생계 위한 나이 든 가장의 선택 '경비원'

그땐 정말 은행 퇴직 직후보다 훨씬 막막했어요. 퇴직금이 전부 소진된 건 옛말이고, 큰 용기를 내서 시작했던 자영업도 실패하다 보니까 정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편의점을 운영하는 옛 은행 동료에게 연락해 봤더니, "나름 괜찮다"고 했어요. 투자 금액이랑 리스크(위험도)가 어느 정도이고 수익은 얼마나 나오는지 계산기를 두드려봤죠. 그런데 가족들이 극구 반대를 했어요. 1년 365일 매일 24시간 동안 문을 열어야 하고 생각보다 수입이 적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더군요.

결국, 생각해낸 게 경비원이에요. 정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습니다. 가끔 뉴스에서 경비원들이 입주민들한테서 폭행을 당하거나 갑질에 시달린다는 보도가 나오니까 겁이 많이 났죠.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됐습니다. 그런데 어떡해요. 가족들 먹여 살리고 노후도 대비해야 하는데….

# 우려가 현실로… '갑질' 피해자가 될 줄이야

처음 경비원으로 일하게 된 아파트 단지에서 소위 갑질을 당했습니다. 2018년 말이었죠. 우리를 관리하는 보안업체 실장이 경비대원들한테 점심시간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단결!"하고 거수경례를 하게 했죠. 그땐 그냥 따라서 했습니다. 동료들이 군말 없이 그렇게 하길래 '경비업계 군기가 원래 세구나'하고 생각했거든요.

3개월 정도 일을 해보니 그 외에도 무분별한 욕설은 물론 화장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밥을 먹게 하는 등 갑질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그 실장은 60대인 우리 경비원들의 막내 동생뻘 되는 사람이었어요.

참다못해 몇몇 동료들과 뜻을 모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 실장은 책임을 지고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우리도 나중에 재계약을 못 하는 피해를 봤습니다.

# 우리가 누굽니까! 멋진 인생 2막 위해 기운 냅시다!

은퇴 후 경비원이란 직업을 고민 중인 우리 또래의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일단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첫 직장에선 심한 갑질도 당했지만 지금 근무하는 아파트 단지의 보안업체는 경비원들을 충분히 배려해주거든요.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는 입주민도 많아 큰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그리고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나만을 위한 저축도 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노후 대비를 이제야 시작한 셈이죠. 월급이 많았던 은행원 시절엔 정작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저축을 한 푼도 못 했어요. 경비원이란 직업의 이미지나 급여 수준과 관계없이 큰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대한민국 경제발전은 물론 민주화까지 이끈 베이비부머 아닙니까! 어깨 쭉 펴고 힘냅시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글 : 임승재차장, 김준석, 배재흥기자

사진 : 조재현, 김금보, 김도우기자

편집 : 김영준, 박준영차장, 장주석기자

그래픽 : 박성현, 성옥희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