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8년에 신설된 도관찰출척사제는 조선건국 직전인 1392년 공양왕 4년 4월에 다시 안렴사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이원이 전라도안렴사로 부임하여 조선건국직후까지 재임하였으며, 이어 김희선이 조선건국후 전라도안렴사로 처음 부임하였다. 태조 2년에 도관찰출척사제가 회복되어 조선건국후 첫 번째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인물이 안경공이다.
△전라도안렴사 이원과 김희선
이원(李原)은 어려서 매부인 권근에 배웠으며 정몽주에게서도 배웠다. 17세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건국 직전인 공양왕 4년 5월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전라도안렴사에 임용되었다. 그해 7월에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였으나 각 지방의 수령들은 그대로 근무하라는 명이 내려 이원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책봉되었으며, 태종 1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세종 3년 좌의정에 임용되었다. 세종 8년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와 함께 부자 상인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첩으로 들이려고 홍여방과 다투다가 발각 되어 여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김희선(金希善)은 조선건국후 처음 임용된 인물로 가선대부 형조전서로 전라도안렴사를 겸하여 태조 원년(1392) 10월에 부임하였다. 문신으로 의학을 집대성하여 조선초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전라도안렴사로 있으면서 태조 2년 도평의사사에 청하여, 각도에 의학교수를 보내어 계수관마다 하나의 의원을 설치하게 하였다.
태조 6년 제생원 설치 일을 맡았고, 정종 원년에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완성하여 강원도관찰사 재임시 출간하였다. 이 의약서는 총 30권으로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형조ㆍ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전라도안렴사 이원과 김희선
이원(李原)은 어려서 매부인 권근에 배웠으며 정몽주에게서도 배웠다. 17세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건국 직전인 공양왕 4년 5월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전라도안렴사에 임용되었다. 그해 7월에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였으나 각 지방의 수령들은 그대로 근무하라는 명이 내려 이원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책봉되었으며, 태종 17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세종 3년 좌의정에 임용되었다. 세종 8년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와 함께 부자 상인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첩으로 들이려고 홍여방과 다투다가 발각 되어 여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김희선(金希善)은 조선건국후 처음 임용된 인물로 가선대부 형조전서로 전라도안렴사를 겸하여 태조 원년(1392) 10월에 부임하였다. 문신으로 의학을 집대성하여 조선초 의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전라도안렴사로 있으면서 태조 2년 도평의사사에 청하여, 각도에 의학교수를 보내어 계수관마다 하나의 의원을 설치하게 하였다.
태조 6년 제생원 설치 일을 맡았고, 정종 원년에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완성하여 강원도관찰사 재임시 출간하였다. 이 의약서는 총 30권으로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져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사헌. 경상도관찰사, 형조ㆍ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건국 후 첫 번째 전라감사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은 태조 2년 안렴사를 혁파하고 다시 도관찰출척사를 설치함에 따라 조선건국 후 전라도관찰사로 처음 임용된 인물이다. 그는 태조 2년(1393) 10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3월 부친상을 당해 이임하였다.
본관은 순흥. 자는 손보(遜甫). 조부는 문정공 안축, 아버지는 문간공 안종원이다. 할아버지 안축은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과 3종(8촌)간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였고,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올랐으며, 안향과 함께 소수서원 배향되었다. 아버지 안종원도 문과급제자이며 강릉부사 때 은덕을 베풀어 부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모셨다. 안종원의 네아들 중온, 경량, 경공, 경검 등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 신흥명문가로 전라도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안종원이 전주사록과 남원부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아우 안경검은 우왕대에 전라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손자 안숭효는 조선 건국 후 세조대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은 태조 2년 안렴사를 혁파하고 다시 도관찰출척사를 설치함에 따라 조선건국 후 전라도관찰사로 처음 임용된 인물이다. 그는 태조 2년(1393) 10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듬해 3월 부친상을 당해 이임하였다.
본관은 순흥. 자는 손보(遜甫). 조부는 문정공 안축, 아버지는 문간공 안종원이다. 할아버지 안축은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과 3종(8촌)간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하였고,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올랐으며, 안향과 함께 소수서원 배향되었다. 아버지 안종원도 문과급제자이며 강릉부사 때 은덕을 베풀어 부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모셨다. 안종원의 네아들 중온, 경량, 경공, 경검 등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 신흥명문가로 전라도와 인연이 깊다. 아버지 안종원이 전주사록과 남원부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아우 안경검은 우왕대에 전라도안렴사를 지냈으며, 손자 안숭효는 조선 건국 후 세조대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승지로 조선건국에 참여한 개국공신
안경공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후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전법판서로 있으면서 윤이·이초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한 정몽주를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해 1392년 조선건국 한달 전쯤인 6월 19일에 좌승지에 제수되어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고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태조가 7월 17일 즉위하고 28일 즉위교서를 반포하는데, 당시 안경공이 도승지로서 이 교서를 읽었다. 조선건국후 좌승지에서 도승지로 승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승정원 도승지는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과 같은 자리이다. 그 도승지 아래가 좌승지이다.
그가 고려말 국왕의 근신으로서 태조를 추대하고 공신에 책봉되었다는 것은 내밀한 곳에서 조선 창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건국직후부터 이듬해 2월 대사헌으로 옮길 때까지 도승지를 역임하였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는 태조 2년 대사헌을 지내고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 <태조실록> 3년 3월조에 그가 전라감사로서 수군첨절제사 김빈길 등이 왜선 3척을 섬멸하였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조선초 전라도에 왜구출몰이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감사 시절 행적은 <세종실록> 세종 3년 그의 졸기에, “일찍이 경상·전라·황해도의 안찰사가 되어 너그럽고 간명(簡明)하여 까다롭게 굴지 아니하였다”라고 평해 놓고 있다. 태종 6년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등을 지냈다.
안경공은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후 경상도안렴사를 지내고, 전법판서로 있으면서 윤이·이초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한 정몽주를 탄핵하였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해 1392년 조선건국 한달 전쯤인 6월 19일에 좌승지에 제수되어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고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태조가 7월 17일 즉위하고 28일 즉위교서를 반포하는데, 당시 안경공이 도승지로서 이 교서를 읽었다. 조선건국후 좌승지에서 도승지로 승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승정원 도승지는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과 같은 자리이다. 그 도승지 아래가 좌승지이다.
그가 고려말 국왕의 근신으로서 태조를 추대하고 공신에 책봉되었다는 것은 내밀한 곳에서 조선 창업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건국직후부터 이듬해 2월 대사헌으로 옮길 때까지 도승지를 역임하였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는 태조 2년 대사헌을 지내고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 <태조실록> 3년 3월조에 그가 전라감사로서 수군첨절제사 김빈길 등이 왜선 3척을 섬멸하였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조선초 전라도에 왜구출몰이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감사 시절 행적은 <세종실록> 세종 3년 그의 졸기에, “일찍이 경상·전라·황해도의 안찰사가 되어 너그럽고 간명(簡明)하여 까다롭게 굴지 아니하였다”라고 평해 놓고 있다. 태종 6년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 등을 지냈다.

△정도전 등의 감형을 청하다
태종 11년 8월 안경공은 정탁ㆍ유창ㆍ조견ㆍ한상경ㆍ조온 등 개국 공신들과 더불어 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ㆍ남은의 죄를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만일 이 무리가 없었다면 태조가 누구와 더불어 개국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안경공 등 개국공신 일행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다음 달 9월에 태종이 탄핵 받은 공신들을 직사에 나오라고 명하여 풀렸으나, 이후 태종 16년에 대제학에 특별 임용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안경공은 태조의 측근이었지 태종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대에 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 등의 죄를 감해달라는 개국공신들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안경공은 이 일로 태종의 미움을 받고 더 이상의 요직에 오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세종실록> 세종 3년 그의 졸기에,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엄하다”라고 하였고, 그의 시호는 양도공(良度公)인데, 이에 대해서도 “온순하고 착하고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이 양(良)이고, 마음이 능히 의로운 일을 좇는 것이 도(度)이다”라고 하였다.
태종 11년 8월 안경공은 정탁ㆍ유창ㆍ조견ㆍ한상경ㆍ조온 등 개국 공신들과 더불어 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ㆍ남은의 죄를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만일 이 무리가 없었다면 태조가 누구와 더불어 개국하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안경공 등 개국공신 일행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다음 달 9월에 태종이 탄핵 받은 공신들을 직사에 나오라고 명하여 풀렸으나, 이후 태종 16년에 대제학에 특별 임용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안경공은 태조의 측근이었지 태종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대에 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 등의 죄를 감해달라는 개국공신들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안경공은 이 일로 태종의 미움을 받고 더 이상의 요직에 오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세종실록> 세종 3년 그의 졸기에,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엄하다”라고 하였고, 그의 시호는 양도공(良度公)인데, 이에 대해서도 “온순하고 착하고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이 양(良)이고, 마음이 능히 의로운 일을 좇는 것이 도(度)이다”라고 하였다.
/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