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천, 아니 순천만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이가 있다. 김승옥. 한국 문학사에서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작가. 김승옥은 순천만의 이미지를 닮은 작가다. 다양한 생물을 품에 안은 갯벌 위로 번지는 낙조의 빛깔이 그의 작품에서 배어나온다. 순천만은 김승옥을 낳았고, 김승옥은 유려한 문체로 소설을 낳았다 할 수 있다.
김승옥의 대표적 작품 ‘무진기행’은 아름다운 묘사로 빚어낸 음울한 수채화다. 가혹한 현실의 삶, 도피의 열망, 그럼에도 도망칠 수 없는 욕망은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60년대 빛나는 감수성이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는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하다.
모든 것이 동면에 들어선 시간, 폐부만 앙상히 남은 갯벌을 보고 나면 비로소 바닥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갖는다. 선연히 물들이는 붉은 낙조에 스산한 바람마저 분다면 삶의 쓸쓸함과 비루함을 느낄 수 있다.

순천만 갯벌의 흙내음과 물내음은 온갖 생명체들이 피워 올리는 자연의 향기다. 이곳은 짱뚱어, 저어새 그리고 흑두루미와 같은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자리한 터라 지형상 위치 또한 좋다. 800만평의 광활한 갯벌과 70만평의 갈대밭이 만든 풍경은 여느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경이다.
순천문학관은 바로 순천만이 포괄하는 남쪽 대대포구에 자리한다. 갯벌, 포구가 환기하는 문학관 이미지는 토속성과 질펀함이다. 그림 같은 초가와 황토마당, 푸른 초목으로 이루어져 60~70년대 시골의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 같다.
문학관은 대대포구 남쪽에 섬처럼 들어앉아 있다. 주차장에서 걸어서 15분여 거리. 스산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들어선 문학관은 여느 시골의 풍경을 닮았다. 방문객들은 이곳 출신 문인 김승옥과 정채봉을 떠올리기에 앞서, 저마다 유년의 기억과 조우할 듯하다.
지난 2010년 개관한 순천문학관은 시골의 작은 마을을 형상화했다. 초가 몇 채와 널찍한 마당은 소담하면서도 빈한한 시골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나 마을이 지닌, 문학관이 아우르는 힘은 결코 규모가 아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콘텐츠가 바로 힘이다. 문학 고유의 향기가 문학관의 본질이라면 김승옥가옥과 정채봉가옥을 비롯해 체험·전시 공간, 문학사랑방은 귀한 콘텐츠다.
먼저 김승옥 가옥으로 향한다. 구름 사이로 오막살이 한 채가 살포시 드러나며, 젊은 시절의 김승옥 사진과 만난다. 무엇보다 그의 다재다능함이 눈에 띈다. ‘감수성 혁명’으로 한국 문단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그는 영화계에서도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김승옥은 시나리오 작가로도 성가를 구가했다. ‘무진기행’을 영화 ‘안개’로 각색했으며 김동인의 ‘감자’,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도 각색해 흥행에 성공했다. 전시실에는 소설 원고를 비롯해 포스터, 신문기사 등이 전시돼 있어 작가의 다양한 면모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김승옥을 있게 한 것은 역시 소설 ‘무진기행’이다. ‘1960년대 한국 문학의 가장 뛰어난 미학적 작품’이라는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김승옥은 21세인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해 김현, 강호무, 최하림, 서정인, 김치수, 염무웅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했다.
특히 그의 소설은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상에 날카로운 촉수를 드리웠다. 지적이면서도 정서적인, 그러면서도 낯선 경험을 선사했던 그의 작품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빛난다.

김승옥관을 나와 정채봉관으로 향한다. ‘오세암’의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의 고향이 순천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순천에서 태어났지만 광양에서 성장했다. 그의 유년은 외롭고 쓸쓸했다. 조모의 슬하에서 자란 그는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으로 글을 썼다. 글이 그에게 벗이자 정체성을 확립하는 통로였던 셈이다.
정채봉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력 가운데 하나가 월간 ‘샘터’다. 저명인사와 장삼이사들의 수필 등 짧은 글을 수록한 잡지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정채봉은 1978년 ‘샘터’에 입사해 작고할 때까지 기자와 편집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동화 특징 가운데 감수성과 소설적 장치를 빼놓을 수 없다. ‘성인동화’라는 말은 그러한 창작 기법에서 연유한다. 어린이에게는 어려울 수 있으나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점에서 세대를 초월한다. 작금의 동화 영역 확장이 그에게서 비롯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전시실에는 친필 원고, 가족사진, 젊은 시절의 모습, 활동 등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특히 ‘오세암’을 입체적으로 구현한 공간이 눈길을 끈다. 설악산 오세암이라는 암자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동화로 구현했는데, 어린이의 마음이 바로 불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오세암’은 지난 2003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2004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장편 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마당으로 나와 초가 이곳저곳을 살핀다. 장독대며 흙담이며 모든 게 아기자기하고 질박하다. 순천만의 토질과 색깔이 깊숙이 배어 있다. 순천만이 낳고 기른 문학의 흔적들이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렇듯 대지 위에 아름답고도 고절한 생명들을 부려놓았다.
갈대밭으로 난 데크로 향한다. 광활한 갯벌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순천만의 시간이 잠시 멈춰 있다. 갯벌에서 부지런히 부리를 놀리는 왜가리의 모습이 쓸쓸하다. 눈 내리는 순천만의 풍경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