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서 군사 쿠테타가 발생한 지 40여 일이 지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미얀마 시민들이 군부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광주학살사건이 미얀마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상황은 ‘역사는 반복되는가’라는 절망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80년 5월 당시 문인들은 보도가 통제된 상황에서 5·18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감에 ‘펜’을 들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명징한 진리를 그렇게 문인들은 몸소 실천했다.
이번에도 광주전남작가회의(회장 이지담)는 ‘펜’으로 미얀마 시인들과 연대하기로 했다. 이들은 억류된 미얀마 시민들의 석방과 민주화 투쟁에 뜨겁게 연대하고자 작품으로 저항을 결의했다.
이번 연대 지지 운동은 김준태 시인의 시 ‘미얀마에서 제비가 날아오른다’를 시작으로 19일까지 고재종·김희수·김완·박관서 등 모두 5명 시인의 작품을 광주일보에 게재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이지담 작가회의 회장은 이번 기획에 대해 “현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인들이 바로 문인인데, 미얀마 학살 사건은 광주의 5월이라는 기시감을 주었던 것 같다”며 “총과 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언젠가는 총칼로 망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오월 문학제 기간 동안에는 모든 회원들의 작품으로 더 굳건한 연대를 계획하고 있다”며 “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과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위한 걸개시화를 오월광장과 5·18국립묘역에 설치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먼저 ‘미얀마에서 제비가 날아오른다’를 게재한 김준태 시인은 광주 5월이라는 원체험이 있는 우리에게 미얀마의 참상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광경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그에게 광주와 미얀마는 동일선상에서 환기되는 민주화의 표상이었다.

김 시인은 80년 5월 당시 상황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린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쓰게 된 배경 등을 설명했다.
“5·18 항쟁 직후 문순태 부국장으로부터 ‘광주’에 관한 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나는 전남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틈틈이 시를 쓰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시 창작 부탁을 받고는 아내와 아이들은 잠시 밖으로 나가게 하고 ‘마치 신들린 듯이’ 작품을 썼다. 머릿속에는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일념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광주 5월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탄생한다. 단 하루만에 150행 가량의 시가 써졌지만 안타깝게도 80%가 검열에 의해 잘려나갔다. 다행히 원문은 외신을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됐고, 광주의 아픔을 알리는 기폭제가 됐다.
김 시인은 자신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 죽어간 광주 사람들의 무고한 넋이 마치 자신에게 입신해 시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은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의 혼백은 또 어디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이번 광주일보에 시를 게재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미얀마 시민들이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며 “악마와도 같은 미얀마 군부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총칼로 정의를 가져도 그것은 곧 모래성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5·18은 비록 뒤늦게 세계에 알려졌지만 이번 미얀마 참상만큼은 전 세계 모든 양심세력들이 연대해 더 이상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며 “인터넷이든 다른 소통수단이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미얀마인들과 연대해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