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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피렌체의 ‘흥선대원군’ 도시의 전성기를 이끌다

[유럽 인문학 기행-이탈리아] 피렌체 베키오 궁전과 시뇨리아 광장

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한가운데에는 기마상이 서 있다. 피렌체를 전성기로 이끌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는 코시모 1세의 동상이다. 코시모 1세와 시뇨리아 광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본다.

 

 

 

■‘위대한 자’의 외손자

 

1537년 피렌체의 지도자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배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암살을 당한 것이었다. 시뇨리아(의회)조차 해산된 상태여서 피렌체에는 도시를 다스릴 정부가 사라진 상태가 돼버렸다. 메디치 가문 장자 계열 남자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피렌체 유력자들은 할 수 없이 48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 피렌체 외곽 무젤로 산에서 살던 코시모라는 17세 소년이 피렌체에 나타났다. 군사적 위업으로 유명했던 조반니 델라 반데 네레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위대한 자’ 로렌초 메디치의 손녀인 마리아 살비아티였다. 따라서 코시모는 로렌초 메디치의 외손자였다.

 

 

코시모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와 함께 무젤로 산에 있는 트레비아의 한적한 벽촌에 들어가 살았다. 원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지만 아버지가 전쟁 비용으로 모두 다 써 버리고 죽는 바람에 졸지에 가난뱅이가 됐기 때문이었다.

 

코시모와 어머니 마리아는 정말 가난했다. 부유한 은행가 필리포 스트로치에게 큰 부담이 되는 빚을 지고 있었다. 빚을 갚지 못하자 편지를 써서 상환을 연기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당시 클레멘스 8세 교황의 도움으로 피렌체 통치자 자리를 지켰던 알레산드르는 처음에는 코시모를 불안하게 여겼다. 외손자이기는 했지만, 메디치 가문에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알레산드르는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측면이 있으면 코시모를 죽여버릴 생각까지 했다.

 

 

코시모와 전혀 정치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트레비아에 살면서 늘 사냥에 빠진 척 했다. 결국 알레산드르뿐만 아니라 피렌체의 모든 사람이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됐다.

 

어느 누구도 기억조차 못할 정도가 된 코시모가 나타나자 피렌체 48인 위원회는 깜짝 놀랐다. 그들 앞에 나타난 코시모는 매우 겸손했고, 약간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코시모는 약간 모자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통치자로 임명해 주시면 그냥 자리만 지키겠습니다. 먹고 살 월급만 주시면 됩니다. 모든 권력은 시의회에 넘기겠습니다.”

 

48인 위원회는 코시모의 겸손함과 우둔함에 속고 말았다. 소년의 행동거지와 말투로 볼 때 충분히 뒤에서 조종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코시모를 피렌체의 새 지도자로 임명했다. 코시모는 이렇게 해서 코시모 1세가 됐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이 피렌체의 새 지도자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들의 내면에는 오랫동안 자라온 복수심과 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엄청난 잔혹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시모는 이러한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혼자서 피렌체로 갔고, 이후에는 어머니와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피렌체의 ‘흥선대원군’

 

“나에게 반대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코시모 1세는 피렌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앉자마자 가면을 벗어던졌다. 곧바로 48인 위원회의 모든 위원을 해임하고 절대 권력을 손아귀에 장악했다. 그는 이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바르젤로 궁전은 감옥 겸 고문실로 바꿨다. 이곳에 매일 많은 사람을 가둬 고문하고 죽였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피렌체 유력자들은 다른 도시로 달아나는 처지가 됐다. 이들은 군대를 조직해 피렌체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코시모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아 반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코시모 1세는 반군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 일가친척을 바르젤로 궁전에 가둬 고문하고 살해했다. 반대파를 바로 죽이지 않고 피렌체의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들을 수 있도록 끔찍하고 잔인한 고문을 실시한 뒤에 처형했다. 나중에는 바르젤로 감옥이 비좁게 돼 포르체타 궁전까지 감옥으로 바꿔 사용할 정도가 됐다.

 

어머니 마리아는 깊은 시름에 빠졌다. 그녀의 남편이자 코시모 1세의 아버지는 피렌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정작 피렌체는 아들 때문에 고통스러운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트레비아를 떠나 남편이 어릴 적에 살던 집으로 들어간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신앙에 몰두해 살다 세상을 떠났다. 코시모 1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코시모 1세는 메디치 궁전에서 살았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딸인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뒤 시뇨리아 회의실로 사용되던 베키오 궁전(시뇨리아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메디치 궁전의 경우 방어에 어려움이 많은데다 자신을 호위할 근위대 숙소가 인근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시모 1세는 베키오 궁전 근처에 법무대신과 군 사령관의 거처 등을 포함해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코시모 1세는 스위스 창기병으로 근위대를 꾸렸다. 근위대 병사들이 근무시간에는 항상 오라카냐의 외랑에 머물도록 했다. 이 때문에 이곳은 나중에는 ‘창기병들의 외랑’ 즉 로지아 데 란치로 불리게 됐다.

 

코시모 1세는 집권 초기에는 아주 냉혹하고 비열한 통치자처럼 보였지만,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한 뒤에는 피렌체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훌륭한 통치자로 변모했다. 피렌체는 코시모 1세 시대에 ‘위대한 자’ 로렌초 시대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됐다.

 

토스카나 산들의 완만한 경사, 연둣빛 잎들로 토스카나의 풍경을 아름답게 하는 올리브 과수원이 펼쳐진 경사면 등 피렌체의 오늘날 모습을 만든 사람은 바로 코시모 1세였다. 도로, 항구, 시장 등 모든 기간 시설들이 그의 시대에 완성됐다. 새로운 공장들이 연이어 세워져 경제가 부흥했고, 대학교들도 설립됐다.

 


 

■아름다운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궁전 앞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는 기마상은 코시모 1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1세가 조각가 지암볼로냐에게 의뢰해 만들었다. 기마상을 자세히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에 서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흉내 내 제작했기 때문이다.

 

시뇨리아 광장에는 코시모 1세 기마상 외에도 많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베키오 궁전 입구에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비드’ 복제품이 서 있다. 원본은 훼손 방지를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겼다. 다비드는 원래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베키오 궁전 앞에 설치됐다.



 

 

시뇨리아 광장에는 또 대리석과 청동으로 만든 ‘넵튠 분수’가 조성돼 있다. 시내로 연결되는 수로를 장식하기 위해 코시모 1세가 주문해 제작한 것이다. 분수는 조각가 바르톨로미오 아마난티가 다른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분수에 있는 청동 말 조각은 지암볼로냐가 제작했다. 다비드처럼 광장에 서 있는 넵튠 분수는 복제품이다.

 

로지아 데 란치에도 볼 만한 작품들이 나열해 있다. 먼저 두 남자가 한 여인을 납치하는 형태의 조각이다. 지암볼로냐가 만든 ‘사비니 여인의 납치’다. 고대 로마를 창설한 로물루스가 여인이 부족한 나라의 현실을 고려해 축제에 초청한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한 사건을 주제로 담고 있다.

 

그 옆에는 한 병사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는 동상이 있다. 다름 아닌 ‘파트로클루스를 일으키는 메넬라우스’다. 파트로클루스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한 아킬레스의 친구였다. 그는 아가멤논과 갈등을 빚어 전투에 나가려 하지 않는 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섰다 트로이 왕자인 헥토르의 창에 맞아 숨진다. 메넬라우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부인 헬레나를 빼앗겨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 스파르타의 왕이다. 이 동상은 창에 맞아 죽어가는 파트로클루스를 메넬라우스가 일으켜 세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다. 코시모 1세는 로마 외곽에서 발견된 토르소 한 점을 매입했다. 한 병사가 벌거벗은 채 죽어가는 동료를 도와주는 작품이었다. 코시모 1세의 손자인 페르디난도 2세는 당대 최고 조각가였던 피에트로 타카에게 작품을 복원하게 했다. 로도비코 살베티에게는 복원작품에 기초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바로 ‘파트로클루스를 일으키는 메넬라우스’였다.

 

로지아 데 란치에는 벤벤누토 셀리니가 코시모 1세의 의뢰를 받아 만든 청동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도 있다. 페르세우스는 신 제우스와 인간 다나에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세리포스 섬의 왕인 폴리덱테스의 요구에 따라 메두사의 머리를 베러 간다. 마침내 여신 아테나의 도움을 받아 거울을 이용해 메두사를 처치한다. 이 조각은 그 장면을 담고 있다.

 


피에 페디가 19세기에 만든 ‘폴리세나의 납치’도 있다. 폴리세나는 트로이의 공주였다. 그녀는 트로이가 멸망당한 뒤 아킬레스의 무덤에 희생양으로 바쳐진 인물이라고 한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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