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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북이 기억해야 할 사람

당항포·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큰 공 세운 김제출신 안위
임란발발 직후 동래부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정읍출신 송상현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서 일본 끌려간 뒤 도자기 명맥 잇는 심수관 집안

임진왜란·정유재란사를 극복한 주요 동력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동을 꼽는다.

그러나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전북 인물들도 많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무명 용사도 존재한다. 호남 방어전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부임해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장수도 있다. 정유재란 당시 침략한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지금까지 예술혼을 꽃피운 주인공도 있다. 이들 가운데 3명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각종 해전에서 큰 공 세운 안휘

 

 

최근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인물을 조명하는 작업에서 부각된 인물이 있다. 김제시와 전북역사문화학회가 지난해 12월 연구용역을 통해 분석한 안위이다.

순흥 안씨 13세손 안위는 1563년(명종 18) 김제군 백산면 생건리에서 출생했다.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평안도에 유배됐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하고 찰방이 됐다. 이듬해에는 일찍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항복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됐다.

안위의 두 왜란 시기 활약상은 이순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관련자료 역시 이순신과 무관치 않다. 안위는 <이충무공 전서>, <난중일기>, <호남삼강록>과 관찬사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나와 있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안위는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 휘하 전부장으로 참여해 왜군 중선 1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 해전에 앞서 왜군 동향파악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당시 이순신과 많은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안위는 서신을 주고받고, 해전 이후 서로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유재란 시기(1597~1598)에도 안위는 활약했다. 당시 안위는 이순신의 지휘 하에 벽파정 앞 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해 선조에게 ‘무경칠서’를 상으로 받았다.

특히 명랑해전에서 활약은 돋보였다. 이순신의 기함이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구하러 가고, 적선 수십 여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 공로로 통정대부(정3품)로 승진한 후,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을 뽑을 때 22번째로 들었다.

당대 인물들은 안위를 높게 평가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안위를 “적개심이 투철하고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장수”로 썼다.

이항복 역시 “안위의 공이 으뜸”이라며 “적들이 전라우도에서 곧장 충청도로 진격하기 못한 이유는 안위의 힘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타지에서 공을 세운 전북 충의지사 송상현

 

 

정조 때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는 다른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순절한 전북 인물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 동래부성 전투에서 전사한 정읍 출신 송상현이 대표적이다.

송상현은 1570년(선조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 4월에는 파직된 고경명(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가 됐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송상현은 왜군과 맞닥뜨린다. <실록>에는 당시 활약상과 평가가 자세히 기록돼있다. 송상현은 성이 포위당한 이후에도 남문에 올라가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왜군이 남문 밖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 하자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됐다. 당시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은 뒤, 앞서 조선통신사로 왔던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줬다.

1741년(영조17)에는 좌찬성에 추증됐다. 현재 그의 묘사는 청주에 있다. 1610년(광해군2) 동래에 있던 묘소를 이장한 후,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지역에 사당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남원성 전투 이후 일본 끌려간 심수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 가운데 도자기 제작 기술을 가진 도공도 포함됐다. 일본에서 15대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심수관가가 대표적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는 정확치 않다. 1598년 심수관의 선조인 심당길이 남원성을 지키다 왜장의 포로가 됐다는 설만 전해진다.

나종우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남원성에서 끌려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몇 해 전 일본에서 심수관을 만났을 때 고향을 남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심당길은 일본의 남국 사쓰마반도 한 모퉁이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도자기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공작도진가편집소(公爵島津家編輯所)> 에 따르면, 3대 심도길이 지역 번주(藩主)에게 기술지도를 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선보인 뒤 제작을 주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4대와 5대는 주춤하였으나 6대 당관이 다시 주재(主宰)를 명받아, 향역조두(鄕役組頭)를 겸했다. 7대 당수는 주재와 향역횡목(鄕役?目)을 겸했고, 8대 당원은 다시 도공에서 주재로 승진했으며 9대 당영은 주재와 향역을 겸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작품과 기록은 12대(1835~1906)부터 남아있다.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1m55cm의 대화병을 출품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어 1902년 하노이 동양제국박람회에서 최고상, 1903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2등상을 연달아 수여해, 전 세계에 사쓰마 도자기와 심수관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화병은 훗날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13대 심수관(1889~1964)은 대학 졸업 후 고시에 합격했지만 공무원이 되지 않고 가업을 이어갔다. 한일합방과 제2차 세계대전이 겹치는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국내외 전람회에서 최고위상, 정부로부터 높은 계위상을 받았다. 숨을 거두기 전 “선조가 피랍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에 한·일 양국에서 기념제를 치르거라. 그 행사의 일환으로 피랍 도공 후예들의 작품 전시회를 하라”는 유언은 널리 알려졌다.

14대 심수관(1926~2019)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모국 속으로 들어왔다. 특히 그는 전북에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1989년 전북도와 자신이 살고 있는 가고시마현간 우호협력이 체결되는 자리에 참석했던 그는 선대로부터 4백년 동안 품어왔던 꿈이 실현된 것 같다는 감회를 밝혔다. 남원도자기 일본 전래 400주년을 맞은 1998년 남원에서 불씨를 가져갔으며, 그 불씨로 구운 첫 도자기를 남원시에 기탁했다.

 

 

 

15대 심수관(1959~)은 2011년 남원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으며, 심수관 도예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선 매년 국제도예캠프를 열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부르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는‘오나리’노래탑이 만인의총에 세워지기도 했다.

 김세희 saehee0127@jj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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