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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인물과 전투 등 전북 왜란사 연구 집중 필요

전북 지역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전북 인물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의병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그 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학술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란극복은 특정인물과 집단의 활약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유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과 비중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에 있는 국외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료를 통해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량해전, 영남권 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한문종 교수는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기록이 있는 일본·중국의 고문서, 사서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국외 자료를 수집한 뒤, 국내 자료와 비교 분석해야 한다”며 “전북 임진왜란사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라고 했다.

각 국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도 설명했다. 한 교수는 “당시 일본은 제후가 각 번(藩)을 다스리는 지방분권 사회였기 때문에 자료가 한 곳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며 “자치단체별로 찾아가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왜란 당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던 중국 역시 상당한 자료가 남아있다”며 “연구자들이 최근 중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한중일 사료를 비판·검증하면서 연구하면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힐 수 있다”며 “국내 사료의 경우 개별 인물을 문중에서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쓰거나 후대에 작성된 사례가 많아 성과가 부풀려졌거나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전북 임진왜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웅치·이치 전투의 재조명, 다른 지역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의병들의 활동 정리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한 교수는 “이런 과제들이 수행되면 영남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 교과서가 영남을 중심으로 서술돼 있는 데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주장했다.하태규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관군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하 교수는 “그 동안 임진왜란사를 의병과 수군, 이순신 중심으로 제한된 인식을 갖고 조명했다”며 “당시 관군의 역할과 당시 행정 체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뒤, 역사적으로 걸맞은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호남 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왜란시기 호남 관군은 근왕병이 무너진 후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과 장수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면서 결성됐고, 전투할 때도 서로 협력하며 적을 공격했다”며 “관군의 장수와 의병장 사이에 전공을 다투거나 시기했던 사례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북 의병의 역할 등 개별 연구과제도 제시했다. 하 교수는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을 조명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그 지역출신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지역사족과의 결합양태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특정집단만의 활약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훌륭한 무장과 관군, 의병, 말없이 희생했던 백성들의 보이지 않은 역할을 조명하는 것도 대단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동희 예원예술대 교양학부 교수(전 전주역사박물관장)


이동희 교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개별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치·웅치 전투, 호벌치 전투, 운암전투,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개별 의병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충남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의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금산(조선시대 당시 전라도) 연곤평에서 1만 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유해와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이 교수는 “단체로 유해를 모셔놓은 의병들의 경우 개별 의병보다 상대적으로 관심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들을 정려하던가. 문화재로 지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접근을 주장했다. 이 교수는 “웅치·이치 등 대표적인 전투를 놓고 지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짚고 조명한 사례는 있다”며 “이제는 전국 학자들이 모여 임진왜란사에서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이 했던 역할을 논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

 

나종우 회장도 인물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 회장은 “전북출신 인물들은 단편적인 사실만 조명되고 있다”며 “연구가 부족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행적을 비롯해 정신사까지 조명할 수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유공자나 후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엄밀하게 연구·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진왜란사의 거시적인 의미도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 회장은 “국가 전체적인 관점으로 국난극복을 한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에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지도부, 의병, 백성들이 하나가 돼서 전란을 극복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며 “이순신, 권율 등 지금까지 부각된 특정 인물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국난 극복은 개별 인물의 힘만으로 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당시 지도부나 정치인들의 실정은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다”고 부연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소녀 직공 조선국녀(朝鮮國女)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기, 왜군은 도고으 화가, 서예가, 공예가 등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끌고 갔다. 그 중 우리나라 기록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소위 ‘조선국녀’라 불리는 베짜는 직공이다.

이 직공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가 끝난 뒤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 일본 문화연간(文化年間)에 출간된 <토좌향토지료(土佐鄕土志料)>에 따르면, 고치현 구로시오초 토호인 오다니 요쥬로(小谷與十郞)가 임란시기 이 지역 영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휘하 군인으로 조선으로 출병했으며, 귀국 때 조선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베를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전수한 기술로 짠 베는 매우 세련됐으며, ‘혼겐(本絹)의 츠무기오리(織)’라 불렸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애를 마감했으며, 가미가와구치 마을 계장사에 있는 오다니 가문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를 세운 것은 요쥬로의 4대손인 오다니 야스지(小谷安次)다. 이후 마을로 이장했다.

묘비는 높이가 50cm정도 되며, 앞면에는 조선국녀(朝鮮國女)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측면에는 천정연간(天正年間: 1573-1583)에 이곳에 왔다는 의미인 천정연중래(天正年中來), 좌측면에는 사망한 해를 모른다는 의미인 졸년부지(卒年不知)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국 출신의 여인으로서 천정연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가 언제 사망하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 이 소녀의 이야기는 남원문화원에서 지난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그림책 ‘정유재란 때 끌려간 한 소녀이야기 조선국女’에서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에는 소녀의 고향으로 추정하는 사매면 수동마을을 배경으로 정유재란의 발발, 일본으로 끌려가는 과정, 일본 벽촌에서의 생활, 베 짜는 기술의 전수 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잠든 소녀의 애달픈 심정도 담겨 있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 고치신문에 ‘조용하게 잠든 조선의 직녀’라는 제목으로 집중 조명했고, 일본 작가 우에노마사에가 지난 1998년 <무궁화소녀>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을 펴냈다”며 “고치현에 ‘조선국녀의 묘를 지키는 ’회도 있을 정도로 주목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도 이 소녀를 비롯해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세희 saehee0127@jj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