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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유럽 인문학 기행] 대영박물관 엘긴 마블스, 파르테논 신전에 언제 돌아가나

[유럽 인문학 기행-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는 ‘엘긴 마블스’라는 게 있다. 엘긴 대리석, 파르테논 마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BC 400년 무렵 그리스의 조각가, 화가, 건축가였던 피디아스가 친구 겸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의 부탁으로 만든 고대 그리스 조각품이다.

 

엘긴 마블스는 원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붙어 있던 조각품이었다. 그러나 1801~12년 엘긴 백작이었던 토마스 브루스가 파르테논 신전은 물론 프로필리아와 에렉티움에 붙어 있던 조각 가운데 절반 가량을 떼어와 영국에 가져왔다고 해서 ‘엘긴 마블스’라고 불리게 됐다.

 

 

■엘긴 백작의 반달리즘

 

엘긴 마블스 이야기는 1798년에 시작한다. 당시 엘긴 백작은 ‘대영제국의 터키 파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돼 터키가 점령하던 그리스로 가게 됐다. 영국을 떠나기 전 그는 정부에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모형 제작자, 제도사, 모작 전문가 등을 함께 데려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파르테논 신전 같은 고대 그리스 보물들의 모작을 만들어 가져오거나, 조각‧건축물 등의 그림을 그려와 영국에서 복사본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국 문화‧예술계에 놀라운 충격을 던져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 정부는 인건비가 과도하게 들 것을 우려하면서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엘긴 백작은 개인 재산으로 직접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는 지오바니 바티스타 루시에리라는 이탈리아 전문가를 고용해 그리스 작품 모작 활동에 필요한 일을 맡겼다. 루시에리는 나폴리 출신의 풍경 화가였다. 시실리에서는 궁정화가로 일하기도 했다.

 

 

엘긴 백작의 의도는 파르테논 신전의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여러 조각품의 모작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그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떨어진 조각들이 조금씩 풍화돼 석회로 돌아가거나 아테네의 현대식 건물을 짓는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일부 아테네 사람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조각품 조각을 몰래 훔쳐내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팔기도 했다. 엘긴 백작은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뒤 한탄했다.

 

‘이러다가는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겠구나!’

 

엘긴 백작은 파르테논 신전과 주변 지역에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루시에리가 일을 총괄적으로 담당했다. 그는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고 있던 터키의 술탄으로부터 허가증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발급받았다는 허가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긴 백작이 이후 엘긴 마블스라고 불리게 된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들을 옮기는 모습을 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한 작가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대부분 사람들로부터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스 사람들은 여기에 무관심했고, 관심 있는 사람들은 유물이 부식과 파괴로부터 보호받게 됐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교양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서진 그리스 예술품 조각들이 아주 귀중하게 여겨졌지만, 터키인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는 조각품을 사가려는 다른 상인들이 흔했다. 만약 엘긴 백작이 조각품들을 확보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프랑스 파리로 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엘긴 백작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엘긴 백작이 조각품들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갈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영국의 시인이자 정치인인 바이런이었다.

 

바이런은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 엘긴 백작이 모은 조각품들을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 의도적으로 떼어낸 프리즈, 메토프 등이었다. 프리즈는 방, 건물 윗부분을 띠처럼 장식한 그림, 조각이다. 메토프는 도리아 건축 양식의 프리즈에 붙은 사각형 패널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부조 조각 등으로 장식했다. 바이런은 조각품들을 둘러보면서 분노했다.

 

“엘긴 백작의 행위는 반달리즘(문화 파괴 행위)이다.”

 

 

엘긴 백작은 조각품들을 런던으로 실어 보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1802년 9월 조각품을 실은 범선 ‘멘토 호’가 런던으로 향하던 중 키티라 인근에서 침몰하고 만 것이다. 이 배에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등에서 뜯어낸 조각과 대리석 좌대 10여 개가 실려 있었다. 엘긴 백작은 현지에 있던 영국 부영사관인 칼루치를 매수해 바다에 빠진 조각품 등을 찾도록 했다. 2년 동안 여러 차례나 시도한 끝에 칼루치는 보물을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현지의 수영 전문가들에게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그 돈은 엘긴 백작이 냈다.

 

엘긴 백작은 보물들을 단순히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보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802년 5월 한 영국 신문은 엘긴 백작의 작품들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면서 그가 왕에게 보여줄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범선에 실린 진귀한 물품들이 목요일 포츠머스의 도크야드에 하적됐다. 클레오파트라의 관, 4000년 된 고대 이집트 수도 테베에서 발굴한 람세스의 두상, 카이로에서 가져온 피라미드 두 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석상, 스키피오 대리석 석상.’

 

 

■박물관으로 간 그리스 유적

 

그리스 유적 발굴 작업은 1801년 시작돼 1812년 끝났다. 엘긴 백작은 이 작업에 7만 파운드를 투입했다.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던펌라인에 있는 그의 저택인 브룸홀 하우스를 조각품으로 장식할 생각이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엘긴 백작은 부잣집 딸이었던 부인과 이혼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의 지원 없이는 조각품 발굴 작업 진행은 고사하고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빚을 청산하기 위해 조각품을 구매할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초 영국 정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 의회의 생각은 달랐다. 의회는 엘긴 마블스 구매 방안을 논의했다. 엘긴 백작이 가져온 조각품은 75m 분량의 프리즈와 메토프 15개, 박공벽 조각 17개였다. 불행히도 박공벽 조각은 이송 과정 등에서 손상을 입는 바람에 온전히 남은 것은 토르소 하나뿐이었다. 이 때문에 구매 논의가 시작됐을 때 의회는 엘긴 마블스의 가치를 저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의원은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구매 논의가 시작됐을 때 작품의 상태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모두가 머리에 그리고 있던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엘긴 백작이 아테네에서 조각품 등을 가져온 게 법적으로 타당하냐는 논란도 일었다. 그는, 터키 정부가 발행한 허가증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사본을 서둘러 의회에 제출했다.

 

“원본은 이미 아테네의 사법관과 총독에게 제출했습니다. 남은 건 이 사본뿐입니다.”

 

엘긴 백작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허가증 내용을 다르게 해석했다.

 

“허가증의 의도는 단지 조각품들의 본을 뜨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프리즈, 메토프, 박공벽 조각을 떼어가라는 게 아닙니다. 정부는 엘긴 백작의 수집품을 사들여서는 안 됩니다. 법적 정당성에 불확실한 게 너무 많습니다.”

 

반면 엘긴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1813년 <젠플맨의 매거진>이라는 잡지사 편집국장에게 그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썼다. 편지는 잡지에 기사로 실렸다.

 

‘엘긴 백작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은 일부 불평이 많은 여행자들의 실망에서 기인합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영토에서 고대 건축물이 있었던 터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옛 영광을 모두 잃어버리고 공허함만 남은 그리스를 발견했습니다.’

 

 

엘긴 백작도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출간했다. 결국 의회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마디로 그의 조각품을 사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엘긴 마블스가 자유로운 정부 아래 망명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엘긴 백작과 의회의 협상은 1816년 6월 타결됐다. 의회는 엘긴 백작에게 3만 5000파운드를 지불하기로 했다. 그가 엘긴 마블스를 구하느라 투입했던 비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영국 정부는 엘긴 마블스를 구입한 뒤 대영박물관에 비치했다.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러갔고 그 중에는 시인 존 키츠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1817년 ‘엘긴 마블스를 본 뒤’라는 시를 지었다.

 

 

이탈리아의 유명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도 엘긴 마블스를 보러 영국에 갔다. 그는 엘긴 마블스를 본 뒤 엘긴 백작에게 편지를 썼다.

 

‘런던에서 소중한 대리석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해 무한한 감사를 드리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대영박물관에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저는 모든 순간을 다 바쳐 고대 예술의 유명한 양식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구현된 자연의 진실을 찬양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의 모든 부분은 가장 정밀한 기술 덕분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나체 조각품은 진실로 아름다운 인체를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제 눈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엘긴 마블스는 지금도 여전히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그리스 정부는 작품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엘긴 백작이 작품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갈 자격이 있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