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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사회를 담은 분구묘

 

고대국가 권력의 형성과 관련하여 고고학적인 지표로는 성곽의 출현과 거대한 고분의 축조를 통해 설명하곤 한다. 그것은 성곽이나 거대 고분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의 동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예에서 보면 고구려와 백제는 거대 규모의 적석총 축조를, 신라는 적석목곽분의 출현을 국가권력 형성시기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고대국가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던 마한사회에 있어서도 삼국시대 고분에 못지않은 거대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바로 대형 분구묘가 그것이다. 마한의 이른 단계의 분구묘를 보면 주매장부로서 성인용의 토광을 설치하며, 그 언저리나 주구에 소아용의 옹관이 안치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보면 혈연관계에서 비롯된 가족묘로 판단된다. 다음 단계에는 주매장부의 토광과 비슷한 규모의 매장부가 평면적으로 추가되며 주위에는 주구를 돌려 영역을 표시한다. 이와 같이 평면적으로 확장이 이루어지는 형태에 따라 분구의 외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분구의 형태가 정형화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한 분구묘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면 주매장부의 시설이 토광에서 대형 옹관이나 석실로 변화가 이루어지며, 분구의 외형도 방형, 원형, 방대형 등으로 정형화가 이루어진다. 나주 복암리 3호분의 분구 내에는 토광과 옹관, 그리고 석실 등의 매장부 시설이 안치되는데, 특히 석실의 경우에는 영산강식과 백제 말기의 석실분이 보인다. 이와 같이 복암리 3호분은 다양한 형태의 매장부가 오랜 기간동안 수평이나 수직으로 확장됨에 따라 분구의 형태가 방대형에 가깝게 재정비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달리 신촌리 9호분과 같이 일정한 묘역의 정형화된 분구를 조성한 후 그 내부에 대형 옹관을 상하 중첩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고창 봉덕리 분구묘는 영산강유역의 분구묘 축조수법과 차이가 있는데, 능선의 끝자락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지형을 이용해서 먼저 동서 52m, 남북 27m 정도로 깍아서 기저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다시 성토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분구묘 축조 방법은 매장부를 안치하기 이전에 이미 철저한 기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분구 내에 5기의 석실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영산강식 석실 뿐 아니라 백제식 석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중앙과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시대의 왕릉과 비교해도 그 규모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마한 분구묘의 축조에서 보면 마한세력도 고대국가로 발전해 갔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왜 백제에 복속되었을까? 그 해답은 마한 분구묘와 삼국시대의 거대 고분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마한 분구묘는 혈연을 기반으로 다장이 이루어지면서 대형화가 이루어지지만, 삼국시대의 최고 지배계층의 고분은 1인을 위한 거대 고분이 축조된다는 점이다. 결국 삼국시대의 거대 고분은 권력 집중을 기반으로 축조가 이루어졌지만, 분구묘에서 보이는 마한의 혈연중심 사회구조적인 특징은 마한 정치체가 고대국가로 발전해 나가는데 있어서 한계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김세희 saehee0127@jj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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