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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이영철의 색다른 제주여행] 학살 현장서 한 번, 영원한 공포에 두 번 죽은 여인

(7) 너븐숭이 순이삼촌
‘너븐숭이 4·3 기념관’서
북촌리 학살 사건 재현
소설 ‘순이삼촌’ 문학비
희생자 상징 쓰러진 비석
돌무더기로 덮인 아기무덤

 

여인은 늘 외톨이였다. 외딴 집에 홀로 살았다.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도 거의 없었다. 여인은 오랜 세월 신경쇠약 환자였다. 마을에선 공인된 사실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이웃과 싸움이 붙었다. 그 집 멍석에 널어놓은 메주콩 두 말이 없어진 모양인데 콩 주인이 외톨이 여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억울한 여인은 펄쩍 뛰며 소리소리 질러 아니라고 항변했다.

콩 주인과의 말싸움은 살벌하게 평행선을 긋다가 어느 순간 여인의 완패로 끝났다. ‘그러면 경찰서 가서 따지자’며 콩 주인이 팔을 끌자 여인은 벼락치듯 뿌리치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그리곤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고만 있었다. 모여든 구경꾼들 눈엔 누가 봐도 ‘도둑 제 발 저린’ 꼴이었다.

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멀리서 군인 모습만 보아도 얼른 몸을 숨기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그 여인은 어느 날 자기 밭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주변에 남겨진 알약들로 보아 자살이었고, 사망한 지는 한 달 가까이 된 듯 보였다.
 

 

평지보다 푹 파인 그 옴팡밭은 30년 전 마을 사람 수백여 명이 한날한시에 군인들에게 총살된 네 개의 밭들 중 하나였다. 공포에 질려 아수라인 속에서 총살 직전 혼절해 쓰러진 덕택에 총알은 그 여인만 피해갔나 보다.

군인들이 철수하고 한밤중에 정신이 돌아온 여인은 자기 위에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를 헤치고 혼자만 기적처럼 살아 돌아왔다. 함께 끌려왔던 어린 자식 둘도 주변 시체 더미 속 어딘가에 분명 있을 터였다. 허나 완전히 넋이 나간 여인이 그날 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순이’라는 이름의 26세 이 여인은 이후 어떤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시신으로 채워진 그 옴팡밭엔 한동안 수백 마리 까마귀 떼가 몰려와 밭 전체를 시커멓게 뒤덮었다. 수백 구 시체더미에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쪼아 먹고 파먹었다. 거의 뼈와 해골만 남은 시신들은 석 달 후에야 동네 사람들 손에 수습되었다. 그럼에도 여인에겐 그 밭에서의 농사가 생명줄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어 비옥해진 옴팡밭에선 이듬해 고구마 농사가 대풍작이었다. 그 옴팡밭을 혼자 일구며 한 해 한 해 살아낸 세월이 30년, 결국 그녀는 그 옛날 자신이 한 번 죽었던 그 옴팡밭에 누워 스스로 생을 마쳤다.

우리가 다 아는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 삼촌’ 이야기다. 4·3사건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참했던 ‘북촌리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도, 우리 제주인들에게야 익숙한 이야기지만 육지사람들에겐 여전히 생소하다.

하지만 SNS에는 ‘제주 가서 너븐숭이 순이삼촌 만나고 왔다’는 외지인 여행자들의 글이 언제부턴가 꾸준히 늘어난다. 특히 매년 이맘때쯤 꽃피는 봄이 되면 더욱 그렇다.

‘넓은’의 ‘너븐’과 ‘자갈과 돌이 많은 거친 땅’ 정도의 ‘숭이’, 두 개의 제주어가 합쳐진 너븐숭이는 원래 일반명사였지만 근래 들어선 북촌리 학살터를 일컫는 고유명사로 변모하는 듯 보인다.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 실내와 인근 주변에서 보여주는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들은 외지인 여행자들의 눈에 가히 충격적이다. 75년밖에 안된 우리 현대사의 모습이라 더 그렇다.

소설을 읽은 이라면 무엇보다도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는 ‘옴팡밭’에 한동안 발이 묶일 것이다. 약을 먹고 누운 순이삼촌이 아담한 돌의 형상으로, 다른 시신들은 비석의 형상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어린 두 자식은 총탄에 잃고 자신만 살아남은 ‘비정한’ 여인이, 자식 죽은 바로 그 옴팡밭 속에 묶여 30년을 김 메고 농사지으며 살았다.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 버린 때문’이었던 그 여인이 어찌 온전한 의식으로 살아낼 수 있었겠는가.

옴팡밭 바로 인근엔 ‘아기무덤’들도 있다. 학살 사건 때 어른들 시신은 다른 곳에 안장을 했으나 어린아이들 시신은 그때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 속 순이 삼촌의 두 아이 주검도 자그마한 그 무덤들 틈에 있을 것이다.

옴팡밭 여기저기 널브러진 비석들에는 여러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문구 내용들의 공통점은 30년이라는 세월이 유독 아프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학살이 있던 그날의 아픔보다는 이후 여인의 삶이 과연 어땠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문구들이다.

4·3의 상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 물론 당시의 직접 희생이 가장 큰 상처였지만,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이 이후 수십 년간 겪었던 고통에 관한 것도 똑같이 큰 상처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많이 회자되는 소위 ‘2차 피해’의 문제인 것이다.

국가기관의 엄연한 불법 폭력이었는데도 하소연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숨 죽여 살아야 했다. 알려져 봐야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두려움에 쉬쉬하며 숨겨야 했다. ‘빨갱이’요, 죄인의 가족이라는 누명은 일상생활의 모든 부문에 또 다른 상처들을 만들어냈다.

학살에 책임 있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국가 권력을 이용하고 반세기 가까이 그런 상황을 만들며 조장해온 결과다. 소설 ‘순이 삼촌’도 그런 점을 일깨우고 있다.

여인에겐 자식 둘을 잃은 상처와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그리고 시체더미를 헤치고 살아나던 그날의 공포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굳어졌다. 그런 내상(內傷)에 덧붙여 세상 사람들의 죄인시 눈초리와 보이지 않은 공포가 외상(外傷)으로 지속 덧씌워졌다.

국가 기관의 사과나 배상 따위 차치하고, ‘안심하라. 이젠 경찰이나 군인이 당신을 잡아가거나 죽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나 믿음만이라도 줬더라면 여인의 내상은 시간과 함께 일부라도 치유됐을 터이다.

픽션 속 인물 순이삼촌은 평생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환자의 삶이 아니라 일부 상처라도 치유가 되며 천수를 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일보 jjnews1945@jejusin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