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폭력을 ‘가정사’의 일부로 치부하지 않고 국가가 나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가정폭력처벌법’이 시행된 지 27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가정폭력 신고·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보다 가정 유지를 우선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수사 관행 탓에 피해는 되풀이되고 있다.
경찰청의 ‘가정폭력 대응 및 수사 매뉴얼’을 보면,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은 가해자의 폭력행위를 강력하게 제지하고 가해·피해자를 즉시 분리한 뒤 피해자의 진술을 들어야 한다. 또 가정폭력 피해자는 가해자 처벌보다는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상습적 폭력에 노출된 경우엔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신고 현장에서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 의사를 묻는 것을 지양하라고 명시돼 있다.
■ 경찰, 가정폭력 사건 대응 매뉴얼 점검해야
특히 이 매뉴얼은 일선 경찰관들이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경고한다. “구속하기도 어렵고 해봐야 벌금형이다” “이런 상처는 작아서 고소할 수 없다” 등 피해자에게 수사 결과를 예측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 “조금만 조심하면 될 것을 왜 사람 성질을 건드리냐” 등 피해의 원인을 단정적으로 말하거나 가해자를 옹호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24년 상담통계분석자료’를 보면, 전·현 배우자와 연인 등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후 2차 가해를 경험한 상담자 1천748명 중 513명(29.3%)은 ‘경찰에게 2차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경찰이 사건을 접수해주지 않았거나 “잘못 신고한 것 아니냐”며 피해자를 오히려 추궁했다고 답했다. 피해자가 반복적으로 폭력행위에 대해 신고했음에도 경찰이 이를 방관한 경우도 있었다.
■ “가정폭력 인식 개선과 판단력 높일 교육 필요”
가정폭력에 대한 일선 경찰관의 인식 부족은 적절한 피해자 보호 조치가 이뤄지지 못하는 장애 요인이다.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라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곧바로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해 접근·연락 금지 등을 조치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지 판별하기 위해 ‘긴급 임시조치 조사표’를 작성한다. 10개 평가 문항 중 3개 문항 이상 ‘예’라고 체크할 경우, 현장에서 긴급 임시조치를 실시해야 한다.
문제는 출동한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방식에 있다. “남편의 보복이 두렵다”고 한 아내의 다급한 신고에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불안을 강하게 호소한다’는 문항에 경찰관이 ‘아니오’라고 기재했던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상황(7월9일자 6면 보도)이 벌어지기도 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가정폭력은 피해자가 사건을 오히려 은폐하려 하거나, 가해자에 의한 오랜 통제에 노출돼 소극적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이때 경찰관이 위급 상황인지 아닌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며 “경찰관을 대상으로 가정폭력 인식 개선과 판단력을 높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형사입건된 1만5518명중 구속 상태 수사 543명 그쳐
재범 위험성 높은 가정폭력 가해자 법원 판결전 수사단계 가해·피해자 분리 ‘구속’ 뿐
2013년 상습·흉기 사범 구속 원칙 정부 지침 마련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 ‘보호처분’ 경우도 35.9%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동탄 납치 살인, 대구 스토킹 살인, 부평 가정폭력 살인. 세 사건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앞서 폭행과 스토킹, 협박 등 범죄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자택은 물론, 직장과 자주 방문하는 장소, 친구 등 지인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재범 위험성이 높다. 가해자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내려지기 전, 수사단계에서 가해·피해자를 확실하게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구속’이다.
■ ‘임시조치’와 ‘피해자보호명령’ 등 무기력한 ‘접근금지’ 제도
수사가 마무리되기 전이나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가해·피해자를 분리할 수 있는 임시조치, 피해자보호명령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이는 법원이 가해자에게 피해자에 대한 접근·연락금지 등을 명령하는 것이지만, 가해자가 이를 위반하면 그만이다. 이런 조치를 위반할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는데, 동탄 납치 살인과 대구 스토킹 살인 사건의 가해자들은 접근금지(임시조치) 명령을 위반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살인을 저질렀다.
가정폭력 가해자의 재범을 막기 위해 2013년 국무조정실, 여성가족부, 법무부, 경찰청 등은 상습적으로 폭력행위를 저지르거나 흉기를 이용한 가정폭력 사범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구속’ 수사하라는 범정부 차원의 지침을 마련했다. 피해자에 대한 보복 행위를 막고 가해자를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는 취지에서다.
■ 상습적 또는 흉기 사용 가정폭력범 ‘구속’ 수사 원칙 무너져
이러한 지침에도 가정폭력범에 대한 구속 비율은 여전히 낮다. 지난해 가정폭력으로 형사 입건된 1만5천518명 중 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은 가해자는 543명(3.5%)뿐이다. 아내를 살해한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의 가해자인 60대 남성도 앞서 지난해 12월 흉기를 든 가정폭력을 저질렀으나 불구속 송치(경찰)되고 벌금 100만원의 약식기소(검찰)로 솜방망이 처벌(6월24일자 6면 보도)을 받았다. → 그래프 참조
검찰이 아예 기소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거나, 형사 처벌이 없는 ‘가정보호사건’으로 송치된 사례도 대다수다. 지난해 검거된 가정폭력범(4만9천284명)의 31.5%(1만4천917명)는 불기소 처리됐다.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돼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받지 않고 사회봉사와 수강명령, 접근 제한 등의 ‘보호처분’을 받은 가정폭력범도 35.9%(1만7천693명)나 된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배우자 등 가해자의 보복을 걱정하다 용기를 내어 경찰에 신고해도,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와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 두려움에 떨며 법원의 징역형 선고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김미선 인천여성가족재단 연구원은 “임시조치와 피해자보호명령 등 제도가 있지만, 가해자가 형사처벌을 각오하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위해를 가할 땐 막을 방법이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구속 수사와 엄벌이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막지 못한 세번의 비극
교제했다가, 스토킹 당하다, 남편에 시달리다, 경찰에 호소했지만 무참히 살해
■ 600장 처벌의견서에도… 신병 확보 늦은 경찰(화성 동탄)
지난 5월12일 경기 화성 동탄에서 30대 여성이 과거에 교제하던 남성에게 납치돼 살해당했다. 앞서 이 여성은 폭행·강요·협박 등을 당했다며 그를 구속 수사해달라고 경찰에 고소장, 고소이유보충서 등 600장이 넘는 처벌의견서를 제출했으나, 가해자는 구속되지 않았다. 동탄경찰서는 가해 남성에 대한 사전구속영장 신청을 검토하던 중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 ‘성실하게 조사 받아’ 법원이 구속영장 기각(대구 달서)
지난 7월10일 대구 달서구에선 50대 여성이 자신을 스토킹하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 남성은 앞서 흉기를 들고 여성을 협박해 ‘특수협박’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달서경찰서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피의자가 성실하게 조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남성은 가스배관을 타고 여성의 집에 잠입해 살인을 저질렀다.
■ 흉기 든 가정폭력에도… 경찰, 구속영장 미신청(인천 부평)
지난해 12월17일 인천 부평구에서는 남편이 자택에서 흉기를 들고 아내를 찌르겠다며 협박해 ‘특수협박’ 혐의로 체포됐다. 아내는 이전에도 가정폭력을 당해왔다고 경찰에 호소했지만, 경찰은 남편이 과거 입건된 적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 남성은 6개월의 접근 금지 명령이 끝난 지 일주일 만에 자택에 찾아가 미리 챙겨온 흉기로 아내를 무참히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