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 현대미술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대전시립미술관은 올해 하반기 첫 기획전으로 '비상 飛上;'을 통해 지역 원로작가 4인의 예술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지역미술 조명사업'의 두 번째 장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수집과 연구, 전시와 교육을 아우르는 '시립미술관 의의'를 재확인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영원한 깨달음과 진정한 미술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이번 전시를 소개한다.

◇ 발전적 해체: 한국화의 뿌리를 다시 짚다
1-2전시실에서의 첫 번째 섹션 '발전적 해체'는 대전 한국화의 기틀을 닦은 세 명의 원로 화가 박승무, 조평휘, 민경갑의 예술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전통 수묵화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 화가들이다.
박승무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근대 동양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다 1957년 대전에 정착했다. 은둔적이고 탈속적인 삶을 살며 오롯이 작품에 몰두한 그는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로 설경과 산수의 고요한 정취를 표현했다. 남종화풍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안개 낀 산과 점묘식의 표현을 통해 자신만의 정서를 담아낸 작업은, 대전 한국화의 정신적 원류로 평가된다.

조평휘는 1932년 태어나 격변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작가다. 황해도 연안 출신인 그는 전쟁통에 피란길에 올라 남하했고, 그 이후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 목원대학교 미술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대전에 정착했지만,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은 남아있었다. 그의 그림 속 산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는 마음 그 자체다.
'운산산수'라 불리는 그의 독자적 화풍은 이러한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화면을 먹빛으로 가득 채운 그의 산수화는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장엄하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지만, 그에게는 유토피아이자 기억 속 고향이다. 마치 구름을 타고 내려다보는 듯한 독특한 시점으로 펼쳐지는 산과 강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풍경을 넘어선 상상 속 고향'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민경갑은 절제된 색감과 단순한 구성으로 한국적인 자연미를 표현한 화가다. 충남 논산 출신인 그는 먹이 번지는 효과를 이용한 '선염 기법'을 통해 깊고 그윽한 산수의 정서를 전해준다. 그의 그림은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기하학적인 선과 면을 조화롭게 배치해 한국 전통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특히 강렬한 원색을 사용한 그의 후기 작업은 자연을 넘어 인간 정서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세 작가의 공통점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새로운 표현 방식에 끊임없이 도전했다는 점이다. 기존 형식을 해체하면서도 그 안에서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려 했던 이들의 작업은, 한국화의 경계를 넓히는 동시에 대전 화단의 정체성을 구축해온 핵심이었다.

◇ 최종태, 본질을 조각하다…영원에 대한 질문
3-4전시실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섹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는 대전 출신의 조각가 최종태의 예술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전시 제목은 가톨릭 기도문 '영광송'의 마지막 문장에서 가져왔다. 종교적 배경은 그의 작업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의미는 단지 신앙에 머물지 않는다. 최종태의 조형 언어는 경계 없는 탐색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전시는 6년 전, 그가 남긴 짧은 한 문장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술관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부탁한 도록 서문에서 그는 '꿈을 늘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은 천양지판으로 다르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다. 이미 조각계의 원로로 자리매김한 예술가가 '꿈'을 이야기했다는 점은, 후배 작가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격려이자 깊은 울림이 됐다. 꿈을 향한 길은 곧 예술의 길이라는 그의 신념이 이번 전시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의 조형 세계는 특유의 미감으로 풀어낸 곡선과 재료 본연에서 드러나는 소박함이다. 작품 속 인물은 대부분은 단아하고 동양적인 이미지를 자아내는데, 이는 자식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은유한다.
아울러 얼굴과 사람, 손, 여인, 성상 등 반복적으로 다루는 형상들은 모두 인간의 보편성과 영원성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미공개 판화와 파스텔화, '얼굴' 연작의 초기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폭 넓게 소개돼 작가의 변모 과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사색에 잠긴 여인부터 청초하고 편안한 얼굴의 다양한 인물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섹션은 단순한 작가 회고가 아니다. 대전시립미술관이 '지역미술 조명사업'을 통해 강조하는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구조적으로 연결하는 큐레토리얼 전략이기도 하다. 작품은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석되고 계승돼야 하며, 그 구조적 기반이 마련된 곳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미술관'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이번 전시의 기저에 있다.
◇ '비상'의 조건, 살아 있는 미술관을 위한 제안
'비상 飛上;'이라는 전시명은 단순한 도약을 뜻하지 않는다. 그 끝에 붙은 '세미콜론(;)'은 문장을 일단 멈추고 다시 이어간다는 문장 부호처럼 전시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계속 이어져야 함을 암시한다.
이번 전시에서 대전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은 총 47점으로 전체 출품작의 30%에 못 미친다. 작품에 대한 심화 연구가 이뤄진 '해제'도 13점 남짓. 이는 미술관이 지역 작가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연구·보존·전시할 수 있는 기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전시 서문에 나오는 '비익조'의 은유는 이 지점을 날카롭게 찌른다. 짝이 없으면 날 수 없는 전설 속 새처럼, 작가와 미술관은 서로에게 필수적 존재다. 작가의 작업이 날개를 펴기 위해선 미술관이라는 보호막과 연구 기반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전시는 그러한 기반 마련을 위한 첫걸음이자 선언이다.
윤의향 대전시립미술관장은 "대전 미술은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 미술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독자적 조형 언어로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작가들을 배출했다"며 "앞으로도 지역 미술 조명사업을 포함한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 등을 통해 대전 미술의 발전과 양분 마련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비상 飛上;' 전시는 15일부터 내달 31일까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다. 별도의 예약 없이 누구나 관람 가능하며, 외국인을 위한 쉬운 해설 프로그램, 감상룸·리딩룸 등 다양한 관람 지원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된다.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