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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전라감사 100인 열전] 소를 타고 다니며 더디게 살려 했던 이행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고 사초에 기록

이행은 태종 3년(1403) 1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4월경 이임하였다. 그는 소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겨 호를 기우자(騎牛子)라고 하였다. 고려말 사관으로 있으면서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고 사초에 기록하였으며, 조선건국후에도 이를 바꾸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 이행의 가계와 외가 평해 황씨

이행(李行)은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태어나 조선 세종 14년(1432)에 졸하였다. 그의 본관은 여주이며, 자(字)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ㆍ백암거사(白巖居士)ㆍ일가도인(一可道人)이다. 호 기우자는 소를 타고 다녀서 붙여진 것이다.

이행의 가문은 고려말 신진세력으로 그의 아버지는 충주목사를 지낸 이천백으로 충목왕대 정치도감에서 활약한 개혁세력이며 공민왕대 홍건적 침입시 전사하였다. 어머니는 평해 황씨로 황서의 딸이다. 평해는 지금의 경상도 울진이다. 이행의 외가는 평해지역에 상당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행은 개경에서 태어났으나 홍건적 침입 때 외향인 평해로 피신하였으며, 이곳에서 성장하였고,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낙향하여 오랫동안 평해에 은거하였다. 유배도 울진으로 왔다. 그의 행보에 외가 평해는 기반이 되었다.

 

△ 호 ‘기우자’와 평해 월송정

평해 월송정은 그가 소를 타고 노닐던 곳으로 그가 지은 월송정 시가 편액으로 걸려 있다. 지난 2019년 바다로 둘러싸인 월송정 가는 소나무숲길에 비를 세우고 기우자길로 조성하였다. 월송정 가까이에 백암온천이 있다. 그의 또 다른 호 백암은 온천이 있는 백암산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외가는 백암산 기슭 날라실(飛良縣) 마을에 있었다. 월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마을이다. 그는 달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에 가서 노닐곤 하였다.

권근은 「기우설(騎牛說)」에서 “나의 벗 이공 도주(李公道周, 이행)가 평해에 살면서,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가지고 소를 타고서 산수 사이에 놀았다 … 무릇 물체를 볼 때 빠르면 정(精)하지 못하고 더디면 그 묘한 것을 다 볼 수 있다. 말은 빠르고 소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랴.”라고 하였다.

 

△ 학문이 출중했던 개혁세력

이행은 공민왕 20년(1372)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에 임용되고 이어 춘추관 수찬이 되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 좌사의대부, 지신사(도승지), 경연 참찬관, 이조판서, 예문관 제학 등을 지냈다. 조선건국후 계림윤, 전라도관찰사, 예문관대제학, 판한성부사, 형조판서, 완산부윤, 개성유후 등을 지냈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고려말 1386년(우왕 12) 탐라가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전의부정으로 탐라에 가서 성주 고신걸의 아들 고봉례를 볼모로 데리고 와서 이를 수습하였다. 1388년 7월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8월에는 관제 개혁과 인사의 공정도 건의하였다. 권신들의 정치 농단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전하께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시고 공(公)으로써 하시고 사(私)를 멸하시라”고 하였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윤이·이초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과 함께 청주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고, 공양왕 4년에는 정몽주를 살해한 조영규를 탄핵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그는 황해도 강음 예천동에 은둔하여 두문동 72현으로도 불린다.

 

△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고 사초에 기록

이행은 태조 2년 정도전 등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는 고려시대의 사초를 그대로 넣었다’는 무서(誣書) 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장 1백대에 가산을 적몰당하고 경상도 울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0월 태조 탄신일이라고 하여 풀려났다.

이 사초사건은 태종 14년(1414) 5월 <고려사>를 개수 할 때 또 불거졌다. 이응이 말하기를 , “신이 듣건대, 태조 때에 정도전ㆍ정총ㆍ윤소종이 고려의 실록을 수찬하자 여러 사관이 모두 사초를 고쳐서 바쳤으나, 오로지 이행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조선이 이런 기록을 실록에 남겼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이 일은 세종대에 또 한번 언급되는데, 세종이 사관이 죽으면 바로 사초를 거둬들이려 하자 사관들이 “이렇게 되면 나라 백성이 이행을 거울삼아 반드시 직필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반대하여 세종이 뜻을 거두었다.

 

△ 전라감사와 전주부윤 역임

이행은 태종 3년(1403) 1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그 다음 해 4월경에 이임하여 1년 3개월 정도 재임하였다. 전라감사 재임시 전주, 여산, 익산 등 14개 고을의 가뭄이 극심해 콩도 심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초 빈발하였던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이때 더욱 심해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태종 4년 1월에 경상감사 남재와 함께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이런 사태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는 또 태종 13년 4월에 전주부윤에도 임용되었다.

 

△ 여언(餘言)

이행은 또 차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현이 찬한 『용재총화』에 보면 그는 성현의 선조 성석인과 친했다. 이행은 물맛을 분간할 수 있었는데, 충주(忠州) 달천수(達川水)를 제1로 삼고, 금강산에서 나와 한강 가운데로 흐르는 우중수(牛重水)를 제2로 삼고, 속리산의 삼타수(三陀水)를 제3으로 삼았다. 그는 또 태종 17년(1417) <농상집요> 에서 양잠방(養蠶方)을 뽑아내어 판각해, 양잠업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세종 14년 81세로 졸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문집으로 1872년에 편찬한 『기우집』이 전한다. 장자 이척은 제학(提學)을 지냈다. 이행은 장자가 죽어 말년에 차자 이적(李迹)의 집에서 기거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이적과 장손 이자(李孜), 서자 몽가(蒙哥) 간에 재산분배를 놓고 불화가 일었다. 이자는 양녕대군의 사위이고 이자의 외조카가 한명회이다. 이행의 장자 계열은 세종대 훈척세력으로 자리하여 성종대 망족(望族)이라고 이를 만큼 성장하였다. /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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