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원주 3.7℃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포항 7.8℃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창원 7.8℃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순천 6.7℃
  • 홍성(예) 3.6℃
  • 흐림제주 10.7℃
  • 흐림김해시 7.1℃
  • 흐림구미 5.8℃
기상청 제공
메뉴

(전북일보) [전라감사 100인 열전]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 유관

유관은 조선건국후 17번째 전라감사로 태종 5년(1405) 7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2월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를 거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세종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데, 부안 우반동에서 실학을 개창한 반계 유형원이 그의 후예이다. 반계가 우반동으로 낙향한 것은 유관의 사패지가 있었던 것에 인연한다. 전남 영암의 모산유씨 영의정 유상운, 좌의정 유봉휘 부자도 유관의 후예로, 유관이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인연을 맺어 그의 장자가 모산에 뿌리를 내렸다.

개국원종공신으로 우의정 역임

유관(柳寬, 1346~1433)의 본관은 문화, 초명은 관(觀), 자는 몽사(夢思)ㆍ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이다.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삼사판관 유안택이다. 이름자를 ‘觀’으로 쓰다가 세종 8년(1426) 그 아들 유계문이 충청감사로 임용되자 관찰사의 ‘관’자가 유관의 이름 ‘관’자와 같다고 하여 ‘寬’으로 고치었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건국후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태종 원년 사헌부 대사헌에 임용되어, 승려 수를 줄이고 5교 양종을 폐할 것을 상소하는 등 불교를 적극 배척하였다. 태종 2년 계림부윤으로 나갔다가 무고를 당해 그의 본향 황해도 문화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태종 5년(1405)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으며, 태종 6년 예문관 대제학, 태종 7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를 겸해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세종 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고려사』를 개수하여 올렸다. 세종 8년 1426년, 81세에 우의정으로 치사하여 88세에 졸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품

유관은 태종 5년(1405) 7월 8일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7월 26일에 전라도 임지로 부임하였다. 후임 전라감사 박은이 이듬해 2월 29일에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유관은 이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7개월 정도 전라감사로 재임하였으며, 지방장관으로서 당시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내린 제문에 “남쪽 지방에 순무하니 사람들은 (유관을) 자르지 말라는 노래를 불렀도다”라고 하였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사정이 배우 곤궁하였다. 감사 부임 직전 메뚜기떼가 기승을 부렸고, 태풍이 몰아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라, 경상, 충청도의 전답 측량이 이루어져 민폐가 컸다.

 
우산으로 지붕에 새는 비를 가린 청백리

유관은 성품이 청렴하고 청빈하여 세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유정승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두어 칸의 초가에서 지내면서도 태평이었다 …몸가짐을 필부와 같이하고 사람이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가 보며,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마밭을 돌아다니면서도 전혀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산으로 지붕에 새는 비를 가렸다는 유명한 일화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실려 있다. 한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유관이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껄껄 웃었다.

서울 낙산 자락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지은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을 복원해 놓았다. 이 자리는 유관이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살았다는 집터이다. 유관은 이수광의 외가 5대조가 된다. 비우당은 겨우 비나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성호 이익은 유관의 청렴을 “정승의 손에 작은 우산 하나 들렸으니/ 지붕이 새는 비를 막기에 부족해서라 …”라고 노래하였다.

 
반계 실학의 산실, 유관의 사패지 부안 우반동

 


반계 유형원은 유관의 후예로 부안 우반동으로 낙향하여 실학의 문을 열었다. 그가 우반동에 자리한 것은 유관의 사패지로 전해지는 그 선조들의 땅이 우반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관에게 맹문ㆍ중문ㆍ계문 세 아들이 있었으며, 맹문과 계문 두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반계는 유계문의 후예이다. 반계의 8대조가 되는 유계문은 문과를 거쳐 충청감사와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반계의 아버지 유흠이 당쟁에 희생되어 이른 나이에 죽자 할아버지 유성민이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가 잡목이 무성한 골짜기를 개간해 전답을 일구고 살았다. 우반동 하면 부안김씨를 떠올리지만 그 이전이 이미 유성민이 우반동에 들어가 살았다.

유성민은 부안김씨 김홍원에게 토지 30결을 매매하였는데 그 매매문기에 이 땅을 유관이 개국공신으로 태조로부터 받은 사패지라고 하였다. 반계는 이런 인연으로 우반동으로 내려가 그의 실학사상을 20여년에 걸쳐 집대성하여 반계수록을 편찬하였다.

 
모산유씨 영의정 유상운, 좌의정 유봉휘 부자

 

 

유상운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유상운의 아들 유봉휘는 경종대 신임사화 때 소론 4대신의 하나로 좌의정을 지냈다. 유봉휘는 숙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도 글이 격식에 맞지 않았는데 유상운의 아들이어서 급제했다고 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가 숙종 25년 다시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모산유씨(茅山柳氏)는 유관의 장남 유맹문의 후예들이다. 유맹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그 유맹문의 후예들이 전라도 나주 모산리(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대대로 세거하여 모산유씨(茅山柳氏)로 불렸다. 모산마을은 유상운과 유봉휘가 부자간에 정승을 지내 ‘부자(父子) 정승마을’이라고 한다.

모산유씨들이 이 자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유관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이곳 경치에 반하여 아들 유맹문에게 정자를 짓게 한 것에 유래하였다. 유관의 명으로 지었다는 영팔정(詠八亭, 전라남도기념물 105호)이 마을에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유관 신도비와 유상운 신도비가 있다. 영팔정을 중건한 인물이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이다. /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기고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