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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2)이완용 둑과 불이 간척지

 

“평생 배운 바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했는지 후세 사람이 이 마음을 알겠지”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에 소장된 을사오적 이완용(1858-1926년)의 글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한 행적에 관하여 이처럼 스스로 위안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 최고 역적으로 여겨질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 내면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던지 본인이 직접 묻힐 묫자리를 지정하고 묻혔던 익산 낭산 외에도 묘의 훼손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여러 장소에 가묘를 썼다.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현 성남시) 출신인 이완용이 서울에서 숨을 거두고 시신이 용산역에서 실려 와 익산에 묻힌 데에는, 1898년(고종 35년)부터 전라도 관찰사로 일했고 천재지변이 있을 때 백성을 위로하는 관직인 위유사도 지내면서 지역 사정에 밝았던 데에 있다. 하지만, 이완용이 천하의 명당이라 찾아놓은 낭산의 묘는 여러 사람에 의해 훼손되다 결국 그의 자손에 의해 폐묘가 되었고 그가 어명을 받들고 행한 일들은 지역의 통탄으로 남았다.

 

 

그 흔적으로 부안군 줄포와 군산시 옥구에는 이완용과 관련 있는 ‘둑’이 있다. 부안의 줄포면에는 오래전 ‘원둑(언뚝)’이라고 불렸던 곳이 있는데, 이곳은 1898년 이완용이 줄포 바닷가 땅이 해일로 침수했을 때 현지를 시찰하면서 바닷물을 막을 수 있는 둑을 쌓도록 군수한테 지시하여 생겨난 둑에서 유래했다. 당시 둑을 쌓고 난민을 구제한 이완용의 공덕을 기념한 ‘이완용 휼민선정비’가 현재 줄포면사무소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관직에 의해 백성을 보살피는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완용의 공덕으로 보기엔 어설픈 흔적이다.

또한, 군산 옥구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이완용 둑’이라 부르는 장소가 있는데, 지금의 오봉마을에 이어지는 길이다. 만경강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강변이나 갯벌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잦은 수해와 가뭄 그리고 염기 많은 토양은 안정적으로 농사짓기 어려웠다. 자신 소유의 땅이 없던 가난한 농민들은 부평초처럼 만경강 일대를 떠돌며 근근이 먹고 살았다.

 

 

 

이들의 노동력과 간척하기 수월한 만경강 일대를 나라에서 눈여겨보고는, 가난한 농민들을 모아 농지를 개간하도록 지원하고 나눠준 농지의 규모에 따라 세를 받고 관리하기 위해 ‘균전사’를 1890년에 옥구에 파견했다. 당시 일대가 이완용이 관장했던 곳이어서 ‘이완용 둑’으로 불린 것이다. 왕실 자금으로 확보된 척박한 땅을 농지로 개간하면 당분간 세금을 면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농부들은 피땀을 흘려 땅을 일구었다.

둑을 만들고 개간 과정을 거쳐 간척지로 전환된 땅은 염기를 제거하면 농지로 활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 땅을 일구고 바닷물이 스며든 땅의 토질을 바꾸고 물을 원활하게 대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약속을 믿고 땅을 일구었지만, 균전사는 약속과 달리 소작료와 당분간 면제해준다는 세금까지 징수했다. 이에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왕실은 소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을 이어갔다. 길어지는 분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인 농민들 앞에 외세의 자본이 손을 뻗는다.

이곳에 러일전쟁 시기 조선 땅으로 진출하여 훗날 ‘조선의 간척왕이자 수리왕’이라 불린 오사카 출신의 ‘후지이 간타로’가 등장한다. 일본의 생활필수품을 들여오고 미곡 등을 일본으로 반출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그는 턱없이 싼 조선의 황무지와 미개간 땅에 눈독을 들였다. 후지이 간타로는 개항장인 군산을 거점으로 내륙으로 뻗어가며 대규모의 땅을 헐값에 사들인 후, 소작 농업경영으로 높은 수익을 내고자 1906년 옥구와 익산 일대에 농장을 설립한다.

그리고 1914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옥구농장 이외에 강원도 철원과 평안북도까지 농장을 확장해 회사 이름을 딴 대규모의 ‘불이농장’을 운영하고 일본인 거주지인 ‘불이농촌’을 조성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불이흥업주식회사의 목적은 분명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에 걸쳐 만든 옥구의 ‘불이 간척지’와 1923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옥구저수지’는 일제가 당면한 과제인 인구증가와 식량부족의 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시범 모델이 되었다.

 

 

생계가 절박한 조선의 농민에게서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대한제국 투자권유서에도 등장하는 고리대금업 수법으로 농민이 돈을 못 갚으면 땅을 강탈해 토지를 확보했다. 그렇게 확보된 600만여 평을 간척하여 농지로 일구고 물을 대기 위한 100만여 평 규모의 옥구저수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영구소작권 보장, 소작료 3년 면제, 간척 공사 임금 지급’이라는 모집 광고를 내고 몰려든 가난한 농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불이 간척지를 일궈 일제의 대표적인 신천지 사업의 선전대상이 되었다.

후지이 간타로는 신천지 사업 즉 이상적인 일본농촌의 건설을 목표로 이민사업을 추진해, 출신지에 따라 불이농촌 안에 나라촌, 히로시마촌 등 일본 지명의 마을과 학교를 만들었지만 농민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이후 무리한 확장과 농업 공황기를 겪고 분쟁에 의한 재판을 받으며 경영난에 봉착하자 1934년 조선식산은행으로 회사가 넘어갔다. 하지만 그 만행은 지속되었고, 당시 저항한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조직적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의 항쟁사로 남았다.

 

 

광복절을 앞둔 시기, 선조들의 뼈아픈 노역의 역사를 왜곡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일본의 군함도가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고창 갯벌을 비롯한 한국의 갯벌은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완용의 둑에서 일제 수탈의 흔적과 희망을 품고 새만금으로 이어지는 간척의 역사는 생명을 품은 갯벌과 함께 이 땅에 깊이 새겨진 어제의 상처와 오늘의 역사를 새기며 훗날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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