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 무예인 ‘활쏘기’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활쏘기를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우리나라 활쏘기는 고구려 벽화와 중국 문헌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가 길다. 활을 다루고 쏘는 방법과 아울러 활을 쏠 때의 태도와 마음가짐 등 여러 면에서 고유한 특성이 있으며, 세대 간 단절 없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활쏘기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비롯해 고대 문헌에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활쏘기와 관련된 무형 자산 이외에도 활·화살, 활터 등 유형 자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점, 활과 화살의 제작기법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무예의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등 다양한 면에서 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지정 명칭을 ‘활쏘기’로 한 것은 활쏘기 용어가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서 확인된 순수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라며 “다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씨름과 마찬가지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편 문화재청은 무형유산으로서의 활쏘기의 가치를 공유하고 전승하기 위해 학술연구, 활성화 프로그램 등을 적극
5월시동인은 1980년 5월 항쟁을 겪으면서 결집된 동인이다. 보도가 통제된 상황에서 시인들은 5·18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감에 동인을 결성했다. 그동안 5월시동인은 제1집 ‘이 땅에 태어나서’(1981년)를 시작으로 제5집 ‘5월’(1985년)을 발행했다. 이어 1994년 제6집 ‘그리움이 끝나면 다시 길 떠날수 있을까’를 발행했다. 5월시동인의 존재와 발자취는 오월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5월시동인과 광주전남작가회의 오월문예연구소가 ‘5월시 판화전’을 개최해 눈길을 끈다. 이번 판화전은 ‘마침내 하나로 끌어안는 흙가슴이 되어’를 주제로 오는 8월 5일부터 25일까지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5월시동인 시집 제7집 ‘깨끗한 새벽’이 지난 94년 6집 출간 26년 만에 출간돼 의미를 더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강형철·고광헌·곽재구·김진경·나종영·나해철·박몽구·고(故) 박주관·윤재철·이영진·최두석 등 5월시동인 11명의 시 22편과 초대시인(김준태·김경윤·박관서·박두규·송광룡·이승철·임동확·조성국·조진태 등) 24명의 시 24편 등 모두 46편이 선보인다
6·25 때 해외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광사 불화 ‘치성광여래도’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종단과 송광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협력으로 송광사 ‘치성광여래도<사진>’를 영국에서 환수했다고 23일 밝혔다. 불화가 한국으로 들어온 것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지난달 국외 경매시장에서 출품된 한국 문화재를 모니터하다 ‘치성광여래도’를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조계종 종단과 정보를 공유했으며, 종단의 통보를 받은 송광사는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송광사 성보박물관 김태형 학예사는 “지난달 28일 영국 경매시장에 나온 불화를 소장자와 협의를 거쳐 환수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불화의 화풍을 감안하면 송광사 산내암자인 청진암에 봉안됐던 불화가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치성광여래도’ 제작 시기는 1898년으로 추정된다. 비단 바탕에 채색 작품(141×102cm)으로 중앙에 치성광여래가 있고 좌우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합장을 하고 있다. 수화승 향호묘영이 차화승 용선천희와 제작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들은 19세기 후반 전라도에서 활동을 펼쳤으며 송광사와 선암사의 불화를 제작했다. 이날 조계
국내 전시회 사상 국보와 보물이 최대 규모로 출품되는 전시회가 열린다. 특히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지정된 국보와 보물(157건) 중 이동이 어려운 건축 문화재와 중량이 무거운 문화재를 제외한 83건 196점이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과 함께 ‘새 보물 납시었네-新국보보물전 2017~2019’를 21일부터 오는 9월 2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로 지친 이들에게 선현들의 지혜가 담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중앙박물관 누리집과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온라인 전시를 병행해,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주요 문화재 30건의 온라인 전시도 다음 갤러리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재 대여 기관만도 재단, 사찰 등을 포함해 총 34곳에 달할 만큼 대규모다. 전시는 3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1부 ‘역사를 지키다’에서는 기록 유산을 소개한다. ‘삼국사기’(국보 제322-1호)와 ‘삼국유사’(국보 제306-3호),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 등이 출품된다. 실록이 지닌 위대한 가치를 전하기 위해 실록의 편찬에서 보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상세히 담았다. 아울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던 남양통닭, 취업을 하고 양복을 맞췄던 삼영양복점, 외식을 하기 위해 들렀던 신락원 등… 위에 언급한 가게들의 공통점은 역사가 오래됐다는 것과 충장로에 자리한다는 점이다. 충장로를 호남상권 1번지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경제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이 크다는 의미다. 범박하게 말한다면 광주는 충장로의 역사다.(물론 금남로도 이에 못지않다) 광주의 도시 형성과 발전사에 있어 충장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역사적 문헌을 보면 고려시대 축조된 광주읍성은 조선 초기 석성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일제시대 광주읍성이 철거되고 도시가 근대체제로 재편되면서 충장로는 광주의 중심 거리로 부상했다. 알려진 대로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1567~1596)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그를 기려 충장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충장로 명칭은 바로 이에서 연유한다. 충장로에 드리워진 역사를 보면 광주의 근현대사뿐 아니라 내일의 광주를 가늠할 수 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에는 학생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선 곳이었다. 현재의 충장로는 충장로 1가에서 누문동 144번지까지의 1093m에
“21세기는 스토리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스토리파워의 시대이기도 하구요. 남도에는 무궁무진한 문화자원이 많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의미 있게 꿰는 것은 바로 스토리이지요.” 법대를 졸업하고 이후 교수로 근무하던 이가 문화 분야로 방향 전환을 해, 다양한 문화정책에 관한 논문을 쓰고 문화관광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서순복 조선대 법대 교수. 영광 출신의 서 교수는 최근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스토리텔링과 접목한 책 ‘한국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발간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40대 중반에 일에 중독될 만큼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어느 순간 번 아웃(Burn Out)이 왔다”며 “당시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매개로 답사 열풍이 불었는데, 문화답사가 내게는 탈출구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당초 그는 일류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통신사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이 남았다. 일을 하는 틈틈이 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대학 교수로 임용이 된다. “프로젝트도 많이 하고 논문도 많이 쓰고, 학회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밤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조선 17세기 불교조각의 대가 현진스님의 작품인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보물 제2066호로 지정했다고 23일 밝혔다. 높이가 2.8m에 이르는 대형 불상인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07년(선조40) 조각승 현진의 주도로 제작됐다. 현진은 17세기 가장 비중있게 활동한 조각승으로 평가받는다. 1622년 광해군비 유씨가 발원한 자수사와 인수사의 11존(尊) 불상 제작을 지휘했으며 왕실과 전국을 무대로 활동을 펼쳤다.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현진 스님이 제작한 불상조각 중 연대가 가장 앞서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의 대좌 밑 묵서(墨書·먹으로 쓴 글)에 따르면, 이 불상은 왕실의 선조들인 선왕과 선후의 명복을 빌고 성불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됐다. 1607년이라는 제작시기로 보아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등 전쟁이 끝나고, 1610년 전후로 진행된 불교 복구 과정 중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대한 규모와 긴 허리,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굴곡에 따라 처리된 옷 주름 등은 17세기 불교 조각의 새로운 경향과 맞물려 있다. 무엇보다 입체미를 강조하기 위해 나무로 형체를 만든 후
전남지역 석탑 효시는 750년경에 건립된 구례 화엄사 4사자3층석탑(국보 제35호)이며, 통일신라시대 전남은 영산강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석탑이 출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은 천득염 전남대 석좌교수가 12일 오후 2시 광주박물관이 주최하는 ‘남도 불교 천년의 증언, 현장과 전망’ 학술대회를 앞두고 공개한 논문에서 드러났다. 천 교수는 ‘전남지역 석탑의 출현과 양식적 특징’이라는 주제의 논문에서 “화엄사 4사자3층석탑은 불교가 도입된 지 350년가량 지난 시기”라며 “전남에는 삼국시대의 석탑은 없고 통일신라시대의 조형(祖形)이다”고 밝혔다. 또한 천 교수는 화엄사 4사자3층석탑 이후의 석탑으로는 광주 지산동 5층석탑과 대흥사 3층석탑 등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백제시대에는 전남이 백제 영토임에도 석탑이 존재하지 않는다. 옹관묘 세력인 마한 세력 영향으로 불교를 수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얘기다. 천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전남지역 석탑은 영산강 주변을 제외한 지역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이는 강한 토착성을 지닌 옹관묘 분포지역에서 백제와 불교문화라는 이질적 요소가 쉽게 도입되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일컫는다. 선조 40년(1607) 사신을 파견하면서 정식 시작된 조선과 일본 교류는 이후 1811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 12회의 문화교류를 펼쳤다. 당시 사절단을 운반하던 선박이 바로 통신사선이다. 문헌에 따르면 최고의 조선기술로 건조된 최대선박이다. 조선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궁궐단청으로 의장을 했다고 전해온다. 실물 크기로 재현한 조선통신사선을 타고 해양 유적 문화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돼 눈길을 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이귀영)는 통신사선을 타고 선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13일부터 11월 25일까지 운영한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통신사선을 타고 떠나는 해양유적 문화기행’, ‘통신사선을 타고 ‘뱃길·물길’ 탐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는 목포지역 문화재와 14세기 청자 운반선인 달리도선 수중발굴 현장 탐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한 통신사 약사와 풍악수 선상공연, 전통 연희놀이와 통기타 선상공연 관람과 국악 배우기 등도 진행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13일부터 11월 25일까지 매달 2회, 모두 12회 운영될 예정이다. 후자는 ‘신안선 해저발굴’ 현장과
‘지금은 집에 머물자.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광주문화재단의 올해 첫 번째 미디어338 기획전 ‘WeRCulture’이 7월 26일까지 빛고을아트스페이스 2층 미디어338 갤러리에서 펼쳐진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을 문화예술로 극복하자는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의 ‘위아컬쳐(WeRCulture)’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코로나를 함께 극복하자는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담은 독창적 영상을 제작해 힘을 보태자는 취지다. 이번 기획전 초대 작가는 신단비, 이석 작가다. ‘신단비이석예술(SHINLIAR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문화예술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작품을 선보인다. ‘지금은 집에 머물자.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두 가지 색을 하나에 담은 영상미와 아울러 ‘그날은 반드시 온다(The day must come)’는 희망을 전한다. 또한 이들의 대표 상징작인 반반 분할 화면 구성 작품 ‘하프 앤 하프 시리즈(Half n half PROJECT Series)’도 이채롭다. 동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함께 있는 듯한 이미지를 담아 코로나 팬데믹으로 함께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