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 44일…인…
청나라에 맞서 남한산성 44일…인조는 끝내 9번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의 명나라 숭배 고집 등 원인 청나라 병자년 재차 조선 기습 침공 조선 인조 남한산성서 포위당해 추위·식량부족에 끝내 삼전도 굴욕 # 정묘년 조선을 침공하다 1627(정묘)년 조선을 침공한 아이신고로 아민의 3만 후금군(後軍)은 아민의 라이벌 대칸 홍타이지(청 태종)의 의향은 물론 명나라군과 차하르 몽골군의 동향도 염두에 두면서 움직였다. 산하이관의 명나라 장군 원숭환과 조선, 차하르 몽골의 협공을 우려한 후금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억류돼 있던 강홍립이 조선과 후금 사이를 중재했다. 온건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됐다. ①후금군은 즉시 철군하며 ②철군 후 다시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③후금-조선은 형제관계로 하며 ④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되 명나라와는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정묘호란 얼마 후 서인 정권은 “조선군의 배신으로 인해 명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패했으며, 강홍립이 호란(胡亂)을 야기했다”고 강변했다. 1630년 명(明) 최후 황제 숭정제는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넘어가 대들보인 국방장관 겸 군총사령관 원숭환을 책형(?刑)에 처했다. 그 한 해 전
- 편집=김형기기자
- 2021-12-27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