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보도접한 피해자 가족들 연락 주고받아… 권리회복운동 전개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부름으로 징집돼 피해를 입었지만, 보상은 물론 참전 여부도 인정받지 못한 국민방위군(7월 21일자 2면 보도=외면받은 아픈역사 '국민방위군'… 새로 만드는 경기도史에 담긴다)의 권리를 찾자는 운동이 펼쳐진다. 27일 경인일보 보도를 접한 국민방위군 피해자 가족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강릉에 거주하는 김연호(50)씨는 "아버님이 정부로부터 국민방위군 징집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면서 국민방위군 피해자 고 진남용씨의 유족(7월 2일자 7면 보도=진실규명 돼도 국가유공자 인정 못받는 국민방위군) 등과 연락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연호씨의 부친인 김기종(1924년생)씨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대한청년단 소속으로 국민방위군에 동원됐고,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속초 간성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전쟁 직후 경황이 없어 참전을 증명할 사진이나 서류를 확보하지 못했는데, 지난해 건강이 악화하면서 생전에 명예라도 되찾아보자는 취지에서 보훈처에 참전 사실 인정 신청을 했다. 인우보증까지 했지만 군번도 없는 국민방위군 신분이라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보훈처 처분을
국회특위서 '부정행위' 적발 불구 '軍지휘체계' 대한청년단 기반 탓 단장 출신 신성모 장관 조사 반대 횡령액수외 사망·실종 등 못 밝혀 6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징집돼 수 만 명이 희생 당하는 피해를 발생시킨 국민방위군 사건은 피해 규모와 참상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극이다. 교과서에도 한 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사건이 묻힌 건, 참상 이후 조사하는 과정부터 첫 단추가 잘못 꿰였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사건이 표면 위로 떠오른 건 1951년 1월 제2대 국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면서다. 같은 해 3월 한 달 가량 조사를 벌인 국회특별조사위원회가 허위인원 조작, 납품 허위기재, 횡령·상납 등의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다만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조사를 반대하고 군 헌병대가 축소 수사를 펼치면서 관련자에게 파면이나 무죄 등 비교적 가벼운 처벌만 내려졌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국민방위군의 지휘체계가 우익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에 기반하고 있어서였다. 신성모 국방장관이 바로 대한청년단 단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도 "책임자인 교육대장은 대부분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 출신의 방위중령이 임명
수십만 '민간인'으로 구성됐던 軍 극한 추위·배고픔 '지옥같은 고통' 故 유정수씨 일기 통해 참상 확인 한국전쟁 70년, 6월의 역사는 치유되지 않는 민족의 슬픔이다. 그 슬픔의 가운데 기억 속에서 잊힌 군인들이 있다. 바로 '국민방위군'이다. 수십 만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은 이들에게 쓰여야 할 국고와 물자를 간부들이 착복해 수만명이 굶거나 얼어 죽는 비극을 겪었다. 참상 후,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나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증언'만 있고, '사료'는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경인일보는 이 사건의 결정적 사료가 될만한 국민방위군의 일기를 발굴했다. 고(故) 유정수씨가 남긴 일기에는 국가의 부름에 응해 전장에 뛰어들었지만, 지옥 같은 현실과 마주한 국민방위군의 처절한 생활상이 담겨 있다. → 편집자 주 '사랑하는 내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들에게 이 기록을 드리노라'. 국민방위군 사건을 재조명해 줄, 유정수(1925~2010)씨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수원군 양감면 요당리(현재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그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된 1950년 12월 23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 76차례 일기를 작성했다.